초등학교 때부터 수많은 인권유린을 당했습니다. 중국주식이 떨어졌다고 화가 난 선생님에게 개 맞듯이 맞았으며 왕따를 권장하기도 했고, 자살하는 친구들, 그리고 돈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구타가 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모든 게 당연시 되었습니다.
저는 그래도 나 혼자만 조용히 하고 있으면 문제되지 않았기에 십년간 참았습니다.
나름 명문 고등학교에서 진학을 했었고 SKY 출신의 선생님들 아래에서 과외, 학원도 다녔습니다. 방학 때는 재수 학원에 가서 재수생들과 같이 공부를 했습니다. 제가 힘들 때 얘기를 들어주는 선생님도, 친구도 있었고 정말 뛰어나서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과 친구들도 있었고 너무 예뻐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여자학생도 있었고 막상 동지가 있었기에 위안이 되었고,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다들 하는 거니까 막연하게 공부를 하고 학교에 갇혀 있었습니다. 야자 끝나고 밥을 먹고, 같이 운동하고 놀고 하는 게 즐거웠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좋아하는 여자애가 5분 지각했다고 선생님에게 출석부로 머리를 두들겨 맞는 모습을 봤고 그 앞에서 침묵했습니다. 정말 스스로가 수치스러웠습니다. 내가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좋아하는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하고 아무것도 못하고 TV보듯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자연스럽게 대학교에 진학을 했지만 대학 안에서 교수님들은 제 주변의 여학생들에게 ‘A학점을 줄 테니 홀딱 벗어봐~’... 하지만 자신들이 10년 넘게 이 대학을 오기 위해 노력했는데 못 다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승낙을 하든 거절을 하든 모두가 쉬쉬했습니다.
대학에서도 정말 똑똑하다는 교수도 앵무새마냥 대학 원서를 읽어서 ‘지지배배 지지배배...’
한글만 읽을 줄 알면 누구나 읽는 걸 한 학기에 400만원이나 주고 배우고 있었습니다.
국문학과 교수가 책을 써본 적이 없었고 경영학과 교수가 한 번도 자신의 기업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부동산학과 교수가 땅을 한 번도 사본 적이 없었는데 제가 볼 땐 동네 바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바보들 밑에 있다가 나중에 대학등록금빚쟁이로 사회에 나와 출발하려니 앞이 막막했습니다. 그러다 이 혼란 속에서 교보문고에 가서 스터디베스트셀러들을 쌓아 놓은 곳을 보니
‘공부 10대 공부에 미쳐라’
‘공부 20대 공부에 미쳐라’
‘공부 30대 공부에 다시 미쳐라’
‘공부 40대 공부 멈추지 마라’
‘마지막에 기가 막힌 게 공부 하다 죽어라!’
그리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던 그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어떤 열정이 생각났습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 모두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초등학교 때 다 부자가 되겠다고 얘기했었고
어린 시절에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살려고 결심을 했던 친구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낮추고 노예로 길러진다는 것을.
기분 좋은 거부
안혁 선언문
초등학교 때부터 수많은 인권유린을 당했습니다. 중국주식이 떨어졌다고 화가 난 선생님에게 개 맞듯이 맞았으며 왕따를 권장하기도 했고, 자살하는 친구들, 그리고 돈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구타가 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모든 게 당연시 되었습니다.
저는 그래도 나 혼자만 조용히 하고 있으면 문제되지 않았기에 십년간 참았습니다.
나름 명문 고등학교에서 진학을 했었고 SKY 출신의 선생님들 아래에서 과외, 학원도 다녔습니다. 방학 때는 재수 학원에 가서 재수생들과 같이 공부를 했습니다. 제가 힘들 때 얘기를 들어주는 선생님도, 친구도 있었고 정말 뛰어나서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과 친구들도 있었고 너무 예뻐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여자학생도 있었고 막상 동지가 있었기에 위안이 되었고,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다들 하는 거니까 막연하게 공부를 하고 학교에 갇혀 있었습니다. 야자 끝나고 밥을 먹고, 같이 운동하고 놀고 하는 게 즐거웠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좋아하는 여자애가 5분 지각했다고 선생님에게 출석부로 머리를 두들겨 맞는 모습을 봤고 그 앞에서 침묵했습니다. 정말 스스로가 수치스러웠습니다. 내가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좋아하는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하고 아무것도 못하고 TV보듯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자연스럽게 대학교에 진학을 했지만 대학 안에서 교수님들은 제 주변의 여학생들에게 ‘A학점을 줄 테니 홀딱 벗어봐~’... 하지만 자신들이 10년 넘게 이 대학을 오기 위해 노력했는데 못 다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승낙을 하든 거절을 하든 모두가 쉬쉬했습니다.
대학에서도 정말 똑똑하다는 교수도 앵무새마냥 대학 원서를 읽어서 ‘지지배배 지지배배...’
한글만 읽을 줄 알면 누구나 읽는 걸 한 학기에 400만원이나 주고 배우고 있었습니다.
국문학과 교수가 책을 써본 적이 없었고 경영학과 교수가 한 번도 자신의 기업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부동산학과 교수가 땅을 한 번도 사본 적이 없었는데 제가 볼 땐 동네 바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바보들 밑에 있다가 나중에 대학등록금빚쟁이로 사회에 나와 출발하려니 앞이 막막했습니다. 그러다 이 혼란 속에서 교보문고에 가서 스터디베스트셀러들을 쌓아 놓은 곳을 보니
‘공부 10대 공부에 미쳐라’
‘공부 20대 공부에 미쳐라’
‘공부 30대 공부에 다시 미쳐라’
‘공부 40대 공부 멈추지 마라’
‘마지막에 기가 막힌 게 공부 하다 죽어라!’
그리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던 그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어떤 열정이 생각났습니다.
초등학교 때 친구들 모두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초등학교 때 다 부자가 되겠다고 얘기했었고
어린 시절에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살려고 결심을 했던 친구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낮추고 노예로 길러진다는 것을.
대학은 세월호 같은 곳임을 알았습니다.
‘이건 아니다.’ ‘조용히 있어라.’
‘그래도 대학을 졸업해야지 않겠니?’
‘취직은 해라!’
‘평범한 삶을 살아라!’
명문대에서조차 행복, 돈, 취직, 시간, 결혼, 보장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세월호에서 뛰어내렸습니다.
2015년 11월 12일
안 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