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대학입시거부선언] 유서 _하지

유서

 


인생의 연료를 너무 빨리 소진해버린 걸까요. 이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득바득 앞으로 나아가더라도,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제 그릇이 작은 탓이죠.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것 같은데 왜 노력하지 않느냐, 하셨죠? 이게 다 한 거예요. 이게 최선을 다한 거예요.
 
제가 쓰러졌던 날 기억하세요? 2016년 겨울, 한 달 동안 두 번을 쓰러졌죠. 온몸이 딱딱한 나무판자가 되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고 당신은 그렇게 묘사했어요. 지금 당신은 그때를 완전히 잊은 것 같아요. 그해를 제가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기 때문이겠죠. 잠들지 못하는 밤의 연속이었어요. 자다 깼다를 반복하면서, 시험 전에는 새벽 5-6시까지 깬 채로, 그렇게 공부했어요. 그러다 하루는 공부할 게 없는데, 자도 되는데, 너무 피곤하고 어지러운데, 잠이 안 와. 그런 날은 말 그대로 눈만 뜬 채로 그 긴 밤을 보냈어요. 저는 이 밤들이 저를 쓰러뜨렸다고 생각해요. 아무도 제 밤을 믿지 않겠지만.
 
병원에서는 쓰러진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어요. 그냥 심장이 잠깐 쉰 거래요. 대신 이 휴식에 익숙해지면 쉬는 시간이 길어질 거라고 했어요. 겁이 났냐고요? 아니요. 사실 저는 쓰러지고서 조금 뿌듯했어요. 주변 사람들도, 성적도 증명해주지 못한 나의 노력이 이렇게 드러나는구나. 병원에 입원해서도 오른손에 링거를 꽂고 왼손으로 수학 문제를 푸는 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나요?
 
며칠만 좀 늘어지게 잘게요. 이렇게 잠들면 다시는 깨어날 수 없겠지만.
편안하게 눈 감고 꿈이나 꿀래요. 이렇게 잠들면 끝없는 어둠뿐이겠지만.
이 글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요? 이제는 그 말을 들을 수 있을까요?
최선을 다했네! 근데 조금 힘 빼고 살아도 괜찮아. 그래도 살 수 있어. 산다는 게 중요해.
 
제가 대학입시를 거부하지 않았다면 아마 이 글이 제 유서가 됐을 겁니다. 요즘은 원없이 자고 있어요. 잠만 제대로 자도 세상은 좀 살만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는 ‘좋은 대학’에 갈 수 없어요. 굶어 죽을 걱정을 해야 해요. 이상하지 않나요? 잠을 안 자면 죽을 듯이 아픈데 잠을 자면 살기 힘들어진다고 말하는 게. 친구가 그런 말을 했어요. “학교는 개개인의 능력을 기를 수 있게 도와주는 곳이 아니라 사회로 나가기 전에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을 솎아내는 곳 같다.” 그 능력 중에는 며칠 밤을 새고도 기계처럼 일하는 능력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사회가 이런 나를 솎아내기 전에 저 스스로를 솎아내려 한 것뿐이에요. 저 같은 사람은 정말 없어져 마땅한 존재인가요? 이게 입시를 통해 이루려 한 것인가요?
 
 
2020년 12월 3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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