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리고 허무한 곳을 넘어서
제가 지금껏 학교를 다니며 분명히 느낀 것은, 학교는 졸리고 허무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긴 수업시간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 고요합니다. 교사의 목소리만이 교실을 가득 메웁니다.
어느 날 조퇴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입시에서 다루는 지식만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몇 시간 째 귀에 꽂히며 웅웅대는 게 견딜 수 없었습니다. 건조하게 지문을 읊다가 자는 학생들에게 간간히 일어나라고 명령하는 목소리가 지겨워 참을 수 없었습니다. 쉬는시간, 점심시간이 되고 길었던 침묵을 비집고 터져 나오는 것은 고작 다양한 혐오 발언과 그것을 재빠르게 쫒는 웃음들뿐이라는 게 너무도 따분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왜 모인 걸까?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더 의미 있는 일을 할 수는 없을까? 지금 우리가 원하는 교육은 뭘까? 많은 질문들과 나름의 결론들이 있었지만, 학교에만 들어서면 저를 압도하는 고요와 고함들에, 제가 상상했던 전환들은 기억 저 편으로 사그라듭니다.
작년은 제가 정말 입시를 잘해내고자 했던 해입니다. 저는 한국 사회가 청소년의 몸에 요구하는 것들을 기꺼이 내면화했습니다. 저는 기계처럼 입시를 준비하려 들었고, 생각처럼 되지 않는 제 몸을 끊임없이 자책했고, 그러다 꾸역꾸역 책상에 앉았고, 여전히 기계같지 않은 제 몸에 우울해했습니다. 이럴 시간에 공부를 하지, 라고 또 자책하고 우울해하면서 저는 결국 한시도 제 마음에 솔직할 수 없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자면, 저는 공부할 수도, 쉴 수도 없는 공간에서 그저 멍하니 떠다니는 기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허무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수능을 치고 나서 몰려온다는 알 수 없는 허무함이 이런 것이겠구나 싶었습니다. 한국의 학생들 대부분은 그 허무함에 질린 날들을 견뎌내며 살아갑니다. 대다수의 학생들이 허무함에 질린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교육부를 보며, 교육부라는 곳이 참 게으르고 폭력적인 공간임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제는 ‘입시 성공’이라는 것이 선택이 되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건 상식이 되어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입시에 죽고 사는 것은 미련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원하는 것 하고 살아야지’ 라는 말은 ‘일단 대학은 가야지’ 가 되고, 그 말은 ‘가려면 좋은 대 가야지’, ‘인서울은 해야지’. ‘서울대 갈 각오로 해야지’. 가 되고, 나중에는 지역별로, 성적별로 ‘oo대는 가야지’. 에 다다릅니다. 맹목적으로 바라야 하는 것들은 끊임없이 주어지며, 청소년으로서의 '지금'이 모조리 삭제될까지 그 목표들은 고요하고 숨 막히게 우리들을 조여옵니다.
저는 제 '지금'을 지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성인으로 ‘거듭나기까지’ 묵묵히 지금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시험 준비를 하지 않았고, 그러자 제가 막연하게 두려워하고 타자화했던 것들이 제게 하나둘씩 다가왔습니다. 저는 제가 입시를 준비하지 않을 때, 제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순식간에 바뀌는 교사의 시선, 표정, 말투를 압니다. ‘입시 준비를 위한 일정을 착실히 따라가지 않는 학생답지 못한 학생’이라는 낙인은 끈질기게 저를 쫒아옵니다.
저는 학교가 학생들의 삶을 짓누르려들수록, 더 끈질기게 통쾌한 전환들을 상상하려고 합니다. 저는 대학 입시 거부를 시작하며 제 자신을 오롯이 마주해가고 있습니다. 대학 입시 거부자로 학교에 남아있으면서는 조용하고 촘촘하게 학생들을 가두던 것들을 하나하나 마주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누가 죽을만큼 공부하래? 공부해두면 다 도움 돼!’ 라는 무신경한 말로 제 시간들을 버리려 들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지금 학생들의 삶에 이상함을 느끼고, 한국의 교육이 엇나가고 있음을 직시하고, 적극적으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행동하고, 비로소 입시 경쟁 아래에서 죽어나간 많은 마음들을 위로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제는 우리를 옭아매던 경쟁의 굴레에 이별을 고하고 싶습니다.
2020년 12월 3일
일움
졸리고 허무한 곳을 넘어서
제가 지금껏 학교를 다니며 분명히 느낀 것은, 학교는 졸리고 허무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긴 수업시간동안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 고요합니다. 교사의 목소리만이 교실을 가득 메웁니다.
어느 날 조퇴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입시에서 다루는 지식만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몇 시간 째 귀에 꽂히며 웅웅대는 게 견딜 수 없었습니다. 건조하게 지문을 읊다가 자는 학생들에게 간간히 일어나라고 명령하는 목소리가 지겨워 참을 수 없었습니다. 쉬는시간, 점심시간이 되고 길었던 침묵을 비집고 터져 나오는 것은 고작 다양한 혐오 발언과 그것을 재빠르게 쫒는 웃음들뿐이라는 게 너무도 따분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왜 모인 걸까?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더 의미 있는 일을 할 수는 없을까? 지금 우리가 원하는 교육은 뭘까? 많은 질문들과 나름의 결론들이 있었지만, 학교에만 들어서면 저를 압도하는 고요와 고함들에, 제가 상상했던 전환들은 기억 저 편으로 사그라듭니다.
작년은 제가 정말 입시를 잘해내고자 했던 해입니다. 저는 한국 사회가 청소년의 몸에 요구하는 것들을 기꺼이 내면화했습니다. 저는 기계처럼 입시를 준비하려 들었고, 생각처럼 되지 않는 제 몸을 끊임없이 자책했고, 그러다 꾸역꾸역 책상에 앉았고, 여전히 기계같지 않은 제 몸에 우울해했습니다. 이럴 시간에 공부를 하지, 라고 또 자책하고 우울해하면서 저는 결국 한시도 제 마음에 솔직할 수 없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자면, 저는 공부할 수도, 쉴 수도 없는 공간에서 그저 멍하니 떠다니는 기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허무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수능을 치고 나서 몰려온다는 알 수 없는 허무함이 이런 것이겠구나 싶었습니다. 한국의 학생들 대부분은 그 허무함에 질린 날들을 견뎌내며 살아갑니다. 대다수의 학생들이 허무함에 질린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교육부를 보며, 교육부라는 곳이 참 게으르고 폭력적인 공간임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제는 ‘입시 성공’이라는 것이 선택이 되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건 상식이 되어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입시에 죽고 사는 것은 미련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원하는 것 하고 살아야지’ 라는 말은 ‘일단 대학은 가야지’ 가 되고, 그 말은 ‘가려면 좋은 대 가야지’, ‘인서울은 해야지’. ‘서울대 갈 각오로 해야지’. 가 되고, 나중에는 지역별로, 성적별로 ‘oo대는 가야지’. 에 다다릅니다. 맹목적으로 바라야 하는 것들은 끊임없이 주어지며, 청소년으로서의 '지금'이 모조리 삭제될까지 그 목표들은 고요하고 숨 막히게 우리들을 조여옵니다.
저는 제 '지금'을 지우고 싶지 않았습니다. 성인으로 ‘거듭나기까지’ 묵묵히 지금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시험 준비를 하지 않았고, 그러자 제가 막연하게 두려워하고 타자화했던 것들이 제게 하나둘씩 다가왔습니다. 저는 제가 입시를 준비하지 않을 때, 제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순식간에 바뀌는 교사의 시선, 표정, 말투를 압니다. ‘입시 준비를 위한 일정을 착실히 따라가지 않는 학생답지 못한 학생’이라는 낙인은 끈질기게 저를 쫒아옵니다.
저는 학교가 학생들의 삶을 짓누르려들수록, 더 끈질기게 통쾌한 전환들을 상상하려고 합니다. 저는 대학 입시 거부를 시작하며 제 자신을 오롯이 마주해가고 있습니다. 대학 입시 거부자로 학교에 남아있으면서는 조용하고 촘촘하게 학생들을 가두던 것들을 하나하나 마주해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누가 죽을만큼 공부하래? 공부해두면 다 도움 돼!’ 라는 무신경한 말로 제 시간들을 버리려 들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지금 학생들의 삶에 이상함을 느끼고, 한국의 교육이 엇나가고 있음을 직시하고, 적극적으로 문제의식을 가지고, 행동하고, 비로소 입시 경쟁 아래에서 죽어나간 많은 마음들을 위로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제는 우리를 옭아매던 경쟁의 굴레에 이별을 고하고 싶습니다.
2020년 12월 3일
일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