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탈감과 거부를 담아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조건들을 부정하고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 앞에서도 턱없이 비현실적인 꿈을 놓지 못한 채 살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놓아주고 싶어요.
저는 특별한 전학을 가기 직전까지 성적도 평균 이상에 속했고 살면서 또래 사이에서 가장 적응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스스로 잘 살고 있는 것인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친이 더는 못하겠다며 힘들다고, 모친이 있는 지역으로 갑작스레 저희를 보내버리기 전까지 말입니다. 저는 5살 무렵 ADHD 진단을 받았었습니다. ADHD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모를 분들을 위해 간략히 설명하면, 주의력 부족, 과잉행동, 충동성, 무질서, 시간관리의 어려움, 사회적 능력 부족 등의 특징을 가지는 정신장애입니다.
이때 전학을 가지 않았더라면 과연 제가 마주할 현실이 지금보다 더 나았을까요? 가족문제와 가난은 항상 제게 당면해 있었고, 그때도 그것들이 문제로써 와닿았던 것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저와 제 동생은 꿈이 무척 많았지만 그것을 향하기 위한 발걸음은 거의 대부분 누군가의 희생과 큰 리스크를 짊어지는 것을 필요로 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꿈만 꾸었습니다.
이제까지 전학을 많이 다녔었지만 이 전학 이후로, 저는 제 가정의 문제와 저의 대인관계 수행에 대한 어려움을 체감했고, 수업에 참여하던 시간에는 점점 딴짓을 하거나 잠을 잤습니다. 성적은 하루아침에 바닥을 찍었지요. 그 사실이 무척 충격적이였지만 공부는 언제든 다시할 수 있고, 만회할 수 있다며 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점점 일그러져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미워하며 무기력과 고립감에 빠져간다는 걸 무시하면서 말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똑똑한 저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잠을 자고 딴짓을 하는 저만 그곳에 있었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저는 스스로를 성적과 학교생활로 평가하며 저를 포기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늦어지는 잠 시간과 등교 시간으로 밥먹듯이 하는 지각, 이해할 수 없고 들어도 재미없는 수업들, 어울리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가기 무서운 대부분의 사람들. 할 수 있는 것은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학교가 가르쳐주는 것 외의 다른 것을 공부하는 것뿐이였습니다. 게다가 학교 밖의 공부는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선생들과, 죽은 동물들이 나와 먹고 싶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거라곤 쌀 뿐인 급식을 학교가 가르치려는 대부분의 방식과는 다른 흥미로운 방식으로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점점 저는 학교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그 기나긴 시간동안 갇혀 있어야 한다는 생각만 들 뿐, 학교 안에는 할 수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공부가 하기 싫으면 밥이라도 먹으러, 친구라도 보러 오라고 선생들이 말하곤 했지만 제겐 셋 다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변에서 무책임하고 안전하지 못하다고 했지만 자퇴하고 학교에서 도망쳐서 하고 싶은 공부들을 하고 싶었습니다. 고 2인데, 1년만 버티면 고졸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는데 왜 자퇴를 하려 하냐는 학교 선생들과 보호자, 주변 어른들과도 자주 싸웠고, 결국 학교를 무단결석하면서 자퇴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동안 주변에서 고졸을 하지 못하면 겪을 수 있는 불이익들을 들먹이며 반대하기도 했었죠. 저는 현실감각이 아주 낮은 편에 속했고, 곧 주변사람들의 말에 고졸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청소년이 학교를 무단결석하고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없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정신장애인에 비건지향인 청소년이 할 수 있는 것은 학교 안에서도 없었지만 학교 밖에서도 당시의 저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학교에 다시 다녔지만, 중간에 다시 나가지 않았습니다. 독립을 할 수도 없고 학교에 적응을 할 수도 없었던 저는 자퇴하지 않았지만 학교에도 나가지 않으며 남은 3학년을 최소한의 의존으로 안전을 보장한 채 질질 끌었습니다. 졸업장은 받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입시로, 그리고 대학으로 향하도록 사실상 강요하는 공간인 학교는 제게 너무나도 폭력적이고 또 배제적인 공간이였습니다.
저는 대학에 가는 일도 이처럼 언젠가는 회유되어 입시를 치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사실 대학에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졸업까지 한다면 대졸 타이틀까지 얻고 청소년 때 당장 먹고 살 수 있는 방법도 없으면서 어떻게 고등학교 자퇴를 하려 하냐며, 저를 무시하던 사람들의 코를 조금은 눌러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입시가 얼마나 돈과 시간, 정신적 자원을 쏟아부어야 하는지 저는 모르지 않습니다. 요즘은 대학 꼭 안가도 된다고들 하지만 가지 않으면 분명 뚜렷한 불이익을 당할 수 있을 것이고, 늘 그렇듯 주변에서 끊임없이 회유하고 협박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공부에는 관심 없지만 그 억압과 불안에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고자 대학에 가거나 자신의 선택을 조정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학교에서 시험을 본 뒤 결과를 보고 우는 학생들을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특정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준다고 하지만 그 대가는 잔혹합니다. 더 좋은 곳에 취직해 안정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다고 하지만 보상조차 희미한 그 지점까지의 과정은 위태롭기 그지없어 적지않은 이들이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맙니다. 코로나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는 이 코로나 시대에도, 그들을 한곳에 몰아넣고 그로 인한 위험까지 감수하도록 부담을 입히는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전까지도 많은 사람들을 고통속으로 몰아넣고 죽였지만, 전세계적인 위험이 모두를 위협하고 있는 지금의 순간까지도 정당화되고 있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들을 울리고 있습니까?
학교를 다닐 때, 제가 속해있던 학급에는 저 말고도 다른 장애를 가진 동급생이 꼭 있었습니다. 물론 적지 않게 있었겠지만 여기서 제가 말하는 것은 비교적 가시성을 가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장애인임을 알 수 있는 장애로 범위를 좁히겠습니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고 저 또한 스스로를 장애인으로 정체화하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따돌림 당할 만해서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며 그들을 일부러 피하거나, 무시하는 행동 또는 말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때때로 궁금해집니다. 그들은 저와 다르게 학교가 가르치는 수업을 잘 들으며 무사히 입시를 치르고 좋은 대학에 갔을까요? 선생들은 다른 학생들에게 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대학에 가라고 하기는 했을까요? 왜 제 친구의 한 학과 건물에는 턱이 있고 엘리베이터도 없으며 오로지 계단만 있을까요? 왜 사람들은 일부 수험자에게 듣기평가 지문이 주어지는 것을 못마땅해하며 비난할까요? 누군가를 대놓고 오지도 못하게 하면서 합리적인 기관인양 하는 대학과, 아무나 치르지 못하게 하면서 공정한 척하며 환상을 주는 입시제도에 저는 정말 많이 흔들리고 지쳤습니다. 이제껏 제가 입시를 준비한다던가, 대학을 준비한다던가 관련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말이에요. 저는 누군가를 떠밀고 생존하며 더 나은 삶을 사는 이 기만스러운 곳에서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을 뒤로 밀치고 있었는데도 여전히 모를 때가 많아 회의스럽습니다. 저는 부디 언젠가 더 나은 제도에서의 대학에 다니게 될 수 있길 바라며 오늘의 대학입시를 거부합니다. 삶이 끝없이 흔들리는 현 시대에서 하루빨리 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덜어지면 좋겠습니다.
2020년 12월 3일
잿녹
박탈감과 거부를 담아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조건들을 부정하고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 앞에서도 턱없이 비현실적인 꿈을 놓지 못한 채 살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놓아주고 싶어요.
저는 특별한 전학을 가기 직전까지 성적도 평균 이상에 속했고 살면서 또래 사이에서 가장 적응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스스로 잘 살고 있는 것인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친이 더는 못하겠다며 힘들다고, 모친이 있는 지역으로 갑작스레 저희를 보내버리기 전까지 말입니다. 저는 5살 무렵 ADHD 진단을 받았었습니다. ADHD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모를 분들을 위해 간략히 설명하면, 주의력 부족, 과잉행동, 충동성, 무질서, 시간관리의 어려움, 사회적 능력 부족 등의 특징을 가지는 정신장애입니다.
이때 전학을 가지 않았더라면 과연 제가 마주할 현실이 지금보다 더 나았을까요? 가족문제와 가난은 항상 제게 당면해 있었고, 그때도 그것들이 문제로써 와닿았던 것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저와 제 동생은 꿈이 무척 많았지만 그것을 향하기 위한 발걸음은 거의 대부분 누군가의 희생과 큰 리스크를 짊어지는 것을 필요로 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꿈만 꾸었습니다.
이제까지 전학을 많이 다녔었지만 이 전학 이후로, 저는 제 가정의 문제와 저의 대인관계 수행에 대한 어려움을 체감했고, 수업에 참여하던 시간에는 점점 딴짓을 하거나 잠을 잤습니다. 성적은 하루아침에 바닥을 찍었지요. 그 사실이 무척 충격적이였지만 공부는 언제든 다시할 수 있고, 만회할 수 있다며 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점점 일그러져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미워하며 무기력과 고립감에 빠져간다는 걸 무시하면서 말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똑똑한 저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잠을 자고 딴짓을 하는 저만 그곳에 있었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저는 스스로를 성적과 학교생활로 평가하며 저를 포기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늦어지는 잠 시간과 등교 시간으로 밥먹듯이 하는 지각, 이해할 수 없고 들어도 재미없는 수업들, 어울리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가기 무서운 대부분의 사람들. 할 수 있는 것은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학교가 가르쳐주는 것 외의 다른 것을 공부하는 것뿐이였습니다. 게다가 학교 밖의 공부는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선생들과, 죽은 동물들이 나와 먹고 싶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거라곤 쌀 뿐인 급식을 학교가 가르치려는 대부분의 방식과는 다른 흥미로운 방식으로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점점 저는 학교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그 기나긴 시간동안 갇혀 있어야 한다는 생각만 들 뿐, 학교 안에는 할 수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공부가 하기 싫으면 밥이라도 먹으러, 친구라도 보러 오라고 선생들이 말하곤 했지만 제겐 셋 다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변에서 무책임하고 안전하지 못하다고 했지만 자퇴하고 학교에서 도망쳐서 하고 싶은 공부들을 하고 싶었습니다. 고 2인데, 1년만 버티면 고졸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는데 왜 자퇴를 하려 하냐는 학교 선생들과 보호자, 주변 어른들과도 자주 싸웠고, 결국 학교를 무단결석하면서 자퇴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동안 주변에서 고졸을 하지 못하면 겪을 수 있는 불이익들을 들먹이며 반대하기도 했었죠. 저는 현실감각이 아주 낮은 편에 속했고, 곧 주변사람들의 말에 고졸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청소년이 학교를 무단결석하고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없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정신장애인에 비건지향인 청소년이 할 수 있는 것은 학교 안에서도 없었지만 학교 밖에서도 당시의 저는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학교에 다시 다녔지만, 중간에 다시 나가지 않았습니다. 독립을 할 수도 없고 학교에 적응을 할 수도 없었던 저는 자퇴하지 않았지만 학교에도 나가지 않으며 남은 3학년을 최소한의 의존으로 안전을 보장한 채 질질 끌었습니다. 졸업장은 받을 수 있었어요. 하지만 입시로, 그리고 대학으로 향하도록 사실상 강요하는 공간인 학교는 제게 너무나도 폭력적이고 또 배제적인 공간이였습니다.
저는 대학에 가는 일도 이처럼 언젠가는 회유되어 입시를 치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사실 대학에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졸업까지 한다면 대졸 타이틀까지 얻고 청소년 때 당장 먹고 살 수 있는 방법도 없으면서 어떻게 고등학교 자퇴를 하려 하냐며, 저를 무시하던 사람들의 코를 조금은 눌러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입시가 얼마나 돈과 시간, 정신적 자원을 쏟아부어야 하는지 저는 모르지 않습니다. 요즘은 대학 꼭 안가도 된다고들 하지만 가지 않으면 분명 뚜렷한 불이익을 당할 수 있을 것이고, 늘 그렇듯 주변에서 끊임없이 회유하고 협박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공부에는 관심 없지만 그 억압과 불안에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고자 대학에 가거나 자신의 선택을 조정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학교에서 시험을 본 뒤 결과를 보고 우는 학생들을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특정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준다고 하지만 그 대가는 잔혹합니다. 더 좋은 곳에 취직해 안정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다고 하지만 보상조차 희미한 그 지점까지의 과정은 위태롭기 그지없어 적지않은 이들이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맙니다. 코로나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는 이 코로나 시대에도, 그들을 한곳에 몰아넣고 그로 인한 위험까지 감수하도록 부담을 입히는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전까지도 많은 사람들을 고통속으로 몰아넣고 죽였지만, 전세계적인 위험이 모두를 위협하고 있는 지금의 순간까지도 정당화되고 있습니다. 대체 무엇이 그들을 울리고 있습니까?
학교를 다닐 때, 제가 속해있던 학급에는 저 말고도 다른 장애를 가진 동급생이 꼭 있었습니다. 물론 적지 않게 있었겠지만 여기서 제가 말하는 것은 비교적 가시성을 가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장애인임을 알 수 있는 장애로 범위를 좁히겠습니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고 저 또한 스스로를 장애인으로 정체화하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따돌림 당할 만해서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며 그들을 일부러 피하거나, 무시하는 행동 또는 말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때때로 궁금해집니다. 그들은 저와 다르게 학교가 가르치는 수업을 잘 들으며 무사히 입시를 치르고 좋은 대학에 갔을까요? 선생들은 다른 학생들에게 하는 것처럼 그들에게 대학에 가라고 하기는 했을까요? 왜 제 친구의 한 학과 건물에는 턱이 있고 엘리베이터도 없으며 오로지 계단만 있을까요? 왜 사람들은 일부 수험자에게 듣기평가 지문이 주어지는 것을 못마땅해하며 비난할까요? 누군가를 대놓고 오지도 못하게 하면서 합리적인 기관인양 하는 대학과, 아무나 치르지 못하게 하면서 공정한 척하며 환상을 주는 입시제도에 저는 정말 많이 흔들리고 지쳤습니다. 이제껏 제가 입시를 준비한다던가, 대학을 준비한다던가 관련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도 말이에요. 저는 누군가를 떠밀고 생존하며 더 나은 삶을 사는 이 기만스러운 곳에서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을 뒤로 밀치고 있었는데도 여전히 모를 때가 많아 회의스럽습니다. 저는 부디 언젠가 더 나은 제도에서의 대학에 다니게 될 수 있길 바라며 오늘의 대학입시를 거부합니다. 삶이 끝없이 흔들리는 현 시대에서 하루빨리 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덜어지면 좋겠습니다.
2020년 12월 3일
잿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