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처음으로 입시경쟁과 학벌주의를 인식할 수 있던 것은 울고 있는 친구를 통해서였습니다.그 이는 시험을 망쳤다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시험을 망치면 좋은 고등학교를 가는데 영향이 있을테고, 그러면 좋은 대학을 가기는 글렀다 했습니다. 그날부터 좋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인지를 고민하게 된 것 같습니다. 누가 좋은 학교라는 것을정하고, 무엇에 의해 좋다고 불릴 수 있는지, 인식되고 일상에 녹아들 수 있는지.
그 이후로도 비슷한 이유로 울고 있는 친구들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희망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해서 우는 친구, 첫 시험에 성적이 낮아서 우는 친구. 그리고 언젠가는 좋은 학교에 대한 동경을 만들어내는 이 교육시스템이 어떻게 폭력을 내면화할 수 있는지도 목격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유독 화를 많이 내고 자주 싸우고,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던 한 친구는 정말 자주 울었습니다. 시선을 괴로워하면서도 학업으로 인한 피로와 고통을 해소할 길은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고, 입시경쟁이 너무도 완연했기에. 차마 그 친구를 욕할 수 없었습니다.
왜 좋은 대학을 가야하느냐는 말에 그이들은 모두 같은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야 좋은 직장을 가고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고. 몇몇 이들에 의해 시장가치가 부각되는 노동을 하기에, 그러한 시장에 진입하기에 더 수월하면 그게 바로 좋은 것이었구나 싶었습니다. 얼마나 더 큰 이윤을 남기느냐, 자본으로 환원되는 착취의 증거가 얼마나 더 크냐가 바로 가치 있는 것을 만드는 기준점이었습니다.
대학을 거부한 이들은 그 자체가 낙인 요인으로 작동하여, 무가치한 것들로 읽히기에 시장에서 배제당합니다. 그리고 불안정하고 위험한 환경으로 내몰려 생존을 위협당합니다. 사람의 가치를 자본의 논리로 환산하고, 무가치한 것들로 만들어 권리를 박탈하는 현재의 사회시스템, 그리고 그에 복무하는 교육시스템이 바뀌어야 합니다.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대학을 거부합니다.
환산 불가
제가 처음으로 입시경쟁과 학벌주의를 인식할 수 있던 것은 울고 있는 친구를 통해서였습니다.그 이는 시험을 망쳤다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시험을 망치면 좋은 고등학교를 가는데 영향이 있을테고, 그러면 좋은 대학을 가기는 글렀다 했습니다. 그날부터 좋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인지를 고민하게 된 것 같습니다. 누가 좋은 학교라는 것을정하고, 무엇에 의해 좋다고 불릴 수 있는지, 인식되고 일상에 녹아들 수 있는지.
그 이후로도 비슷한 이유로 울고 있는 친구들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희망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해서 우는 친구, 첫 시험에 성적이 낮아서 우는 친구. 그리고 언젠가는 좋은 학교에 대한 동경을 만들어내는 이 교육시스템이 어떻게 폭력을 내면화할 수 있는지도 목격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유독 화를 많이 내고 자주 싸우고,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던 한 친구는 정말 자주 울었습니다. 시선을 괴로워하면서도 학업으로 인한 피로와 고통을 해소할 길은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고, 입시경쟁이 너무도 완연했기에. 차마 그 친구를 욕할 수 없었습니다.
왜 좋은 대학을 가야하느냐는 말에 그이들은 모두 같은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야 좋은 직장을 가고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고. 몇몇 이들에 의해 시장가치가 부각되는 노동을 하기에, 그러한 시장에 진입하기에 더 수월하면 그게 바로 좋은 것이었구나 싶었습니다. 얼마나 더 큰 이윤을 남기느냐, 자본으로 환원되는 착취의 증거가 얼마나 더 크냐가 바로 가치 있는 것을 만드는 기준점이었습니다.
대학을 거부한 이들은 그 자체가 낙인 요인으로 작동하여, 무가치한 것들로 읽히기에 시장에서 배제당합니다. 그리고 불안정하고 위험한 환경으로 내몰려 생존을 위협당합니다. 사람의 가치를 자본의 논리로 환산하고, 무가치한 것들로 만들어 권리를 박탈하는 현재의 사회시스템, 그리고 그에 복무하는 교육시스템이 바뀌어야 합니다.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대학을 거부합니다.
2020년 12월 3일
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