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교육 제57호 (2020년 7·8월)
https://communebut.com/magazine/?idx=4287445&bmode=view
‘배우지 못한’ 페미니즘
- 페미니즘 운동 속 대학거부자의 언어
윤서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활동가.
2018년부터 페미니즘 운동과 대학거부 운동을 함께하고 있다.
오랫동안 여성의 고등교육 진학률은 성평등의 한 요소로 여겨졌다. 여성이 교육에 얼마나 접근할 수 있는지는, 적어도 그만큼의 기회 평등이 실현되었음을 보여 주는 지표였다. 많은 나라들에서 그랬듯 한국에서도 여성은 교육의 기회에서 배제되어 왔다. 대학교육은커녕 의무 교육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대학보다 결혼, 출산, 육아가 먼저였고 손위·손아래 남자 형제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대느라 딸 여럿이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가는 경우가 발에 채도록 흔했다. 그러다 시집을 가면 한 여성의 인생에서 배움은 완전히 끊겼다. 2003년 없어진 이화여자대학교의 금혼 학칙을 생각해 보라. 20세기 초, 졸업하기도 전에 팔려 가듯 시집갔던 소녀들을 위해 학교에선 결혼하지 않은 여성만이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결혼은 여성의 교육과 지적 성장을 막는 큰 방해물 중 하나였다. 금혼 학칙은 여학생이 결혼을 늦추고 대학교육을 지속할 수 있는 명분이 되어 주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고, 남성 중심의 교육에서 소외된 여성을 위하여 만들어졌던 여성대학이 ‘역차별’ 논란을 만들어 내는 지금에 이르렀다. 더 이상 여성 다수에게 대학은 싸워서 얻어야 할 것이 아니게 되었다. 나의 할머니 세대에는 대학을 간 사람이 극히 드물었지만, 어머니 세대에는 반 이상이 대학에 진학했고, 내 또래는 10명 중 7명이 대학에 간다. 여남 상관없이 그렇다. 오히려 현재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여성이 더 우수한 성적을 내며, 2008년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남성을 앞선 이후 매해 여성이 남성에 비해 5%가량 더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그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이제 여자라고 대학에 못 가는 세상은 끝난 듯 보인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선 상황이 달라진다. 2018년 기준, 여성 고용률은 50.9%, 남성은 70.8%이다. 2018년 여성의 대학 진학률 73.8%에 한참 못 미친다.(“13년째 남학생보다 대학 많이 가는 한국 여학생…고용률은 50%”, 〈중앙일보〉, 2019년 7월 1일.) 이뿐만이랴. 여성은 일을 하면서도 남성 임금의 70%가 안 되는 임금을 받는다. 일하는 햇수도, 시간도 짧고 불안정하다. 30세가 넘어가면 많은 여성들은 그간 쌓아 왔던 일 경험을 중지하고 돌봄의 영역으로 옮겨 간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경우는 훨씬 적었다. 대학에 갔지만, 고용은 불안정한 상황. 역시 여남 구분 없이 벌어지는 문제라지만,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라고 말하기엔 수치로 드러나는 성별 차이가 너무 크다. 그동안 역사 속에서 한국의 여성들은 대학에 가도 같이 학생운동, 민주화운동을 한 남성 동지로부터 어처구니없는 성차별 발언을 듣고, 남성 중심적 조직 문화 속에서 성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여 제대로 대처하지도 않는 사회에 살고 있었다. 페미니즘 운동에서 대학은 여성들이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모으고, 직접 주도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왔다.
실재하는 기반이 되어 주었던 대학
민주화의 바람이 분 1980년대, 한국 사회에 여성운동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반성폭력 운동이 펼쳐진 1990년대를 지나는 동안, 특히 1990년 중반에 등장하여 2000년대까지 활동한 ‘영 페미니스트young feminist’들은 주로 대학을 기반으로 활약하였다. 이전 세대와는 다른, 새롭고 폭넓은 방식의 운동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진 젊은 페미니스트들. 영 페미니스트를 대표하는 인물상은 주로 서울 지역 대학에 다니는 여성 대학생이었다. 그들은 서울대학교 조교 성희롱 사건(1993년), 이화여자대학교 대동제 고대생 난동 사건(1996년), 연세대학교 한총련 여학우 성추행 사건(1996년) 등 대학가의 성폭력을 고발하고 공론화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네트워크를 만들고 연대하며 파장을 일으켰다.(김보명(2008), 〈1990년대 대학 반성폭력 운동의 여성주의 정치학〉, 한국여성연구소.) 대학에는 수많은 페미니즘 동아리와 모임이 생겼다 사라졌고, 페미니즘을 알리는 유쾌한 문화제와 영화제가 열렸다. 교지와 저널을 발간하여 페미니즘의 언어와 문화를 기록하고 재생산하였다. 대학가 페미니즘은 그즈음 보급된 PC 통신과 함께 온라인으로 영역을 넓혀 가며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 당시 대학을 기반으로 활동한 영 페미니스트들에게 대학은 단순한 취업을 위한 관문이나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넘어, 처음 페미니즘을 접하고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언어화하고 페미니스트 동료를 만나 대학 네트워크에서 교류할 수 있는 장이 되었을 것이다. 현재에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한 페미니즘 실천과 담론들이 ‘제4의 페미니즘 물결’이라고 불리는 가운데, 페미니즘 운동에서 대학의 역할은 다소 축소되었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오면 대학은 여전히 영영 페미니스트(2015년 이후 나타난 페미니스트들은 이전 세대와 구분을 위해 ‘영영 페미(니스트)’로도 불리고, 온라인에서 태동해 ‘넷페미(net-feminist)’로도 일컬어진다. [“[‘영 페미’ 광장으로 나오다] ① ‘메갈리아’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여성신문〉, 2018년 12월 1일] 참고.)들, 현 1020 페미니스트들에게 실재하는 기반이 되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포함한 영영 페미니스트의 대부분은 학교나 가정 등 일상을 살아가는 곳이 아닌 온라인에서 처음 페미니즘을 접한다. 포털 사이트와 실시간 검색어, SNS,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핫한’ 이슈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한 줌의 페미니즘 이야기들부터 시작한다. 나의 경우에도 2015년 메갈리아의 미러링과 웹툰 작가와 성우의 ‘페미 논란’(곧 ‘메갈 논란’이 된)을 접하면서 처음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논란과 비판, 관심의 발원지인 온라인은 격렬했고, 온라인 밖의 세상은 고요했다.
여성학자 손희정은 2015년의 페미니즘을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라고 표현했다. 그때의 페미니즘은 폭탄 터지듯 ‘붐’을 일으켰다. 페미니즘보다 ‘메갈리아즘’이라고 표현하는 게 어울릴 정도였다. 인터넷은 메갈리아에 대한 욕설과 가짜 정보, 터무니없이 적은 수의 메갈리아 출처 미러링으로 도배되었다. 메갈리아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들이 많았기에, 내가 처음 가졌던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고 입시와 바쁜 일상에 묻혀 사그라지는 듯했다. 친한 친구에게 말하기도 어색한 시간이 지나가고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더 선명한 목소리들이 눈에 보였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적힌 포스트잇은 약간의 불신과 무관심으로 얼어 있던 내 가슴을 녹였고, 나는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메갈리아를 돌아봤고 뉴스 기사에 올라오는 포스트잇의 내용을 살피며 페미니즘 책을 읽었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기분이란 걸 알게 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내게 필요했던 것은 이 폭탄을 함께 껴안을 페미니스트 동료였다. 마땅한 동료를 찾지 못했던 고등학교 3학년, 대학입시거부와 대학 진학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차라리 여대에 입학해 페미니즘 동아리에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그러면서 남들처럼 대학에 가는 것이 나에게도, 부모에게도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이 아니면 내 일상에서 페미니즘에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이 뚜렷이 없어 보였다. 또, 그때 나는 내가 제대로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잘 모른다고 생각해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명명하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제4의 물결이라는 건 왔다는데, 막상 바로 옆에서 이야기해 주고 함께 이야길 나눌 사람이 없었던 탓이었다. 대학에 가서 페미니스트 친구를 사귀고 여성학을 배우면 페미니즘이 자연스레 내 삶에 스며들겠거니, 그럼 나는 당당하게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내가 다음 해 모든 대학에 떨어지고 억지로 시작한 재수를 한 달 만에 관둔 뒤, 11월 쌀쌀한 수능일에 서울 청계광장 앞에서 대학거부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 인생은 정말 모르는 것이다. 심지어 나는 내가 막연히 알고 있던 구체적이고 유일한 방법 ― 여대에 진학해서 페미니즘 동아리 들기 ― 이 아니고도 스스로를 당당히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했다. 대학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페미니스트 동료’들도 그해 온갖 페미니스트 그룹을 찾아가서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찾아가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청소년기에도 그럴 수 있었겠지만 입시와 불안이 나를 자주 무기력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온라인 안팎의 격렬함과 페미니즘 논의들을 만나고 나니 이제야 나의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나의 질문은, ‘페미니즘 운동에서 대학을 거부한 나의 언어로 무엇을 말할 수 있느냐’이다.
학력 차별과 여성 차별, 틀린 그림 찾기
대학이 자본이라면, 하나라도 더 자원을 얻어 방패로 써야 할 여성들에겐 대학은 ‘선택’보다는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생각될 것이다. 더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보험이나, 쿠션 같은 것. 나와 내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대학은 자주 그렇게 비유되었다. 혹은 대학은 공격할 수 있는 창이 되기도 했다. 학력이란 권력으로 성 권력, 나이 권력, 자본 권력 등을 찍어 누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창으로, 곧 학력 권력으로 성별, 나이, 경제력 등에 대응하는 것은 적절한가? 옳은가? 한 청소년운동 활동가 동료가 내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어린 여성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더 강력한 여성으로 돌아와 당신의 세계를 박살 낼 것이다”라는 페미니즘 운동의 표어에서는 어린 여성의 강함을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어린 여성의 힘을 무시하는 문화가 계속된다면, 강한 어른 여성이 무엇을 부수든 근본적인 것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나이주의, 청소년 보호주의 문제를 놔둔 채로 여성 차별을 해결할 수 있을까? 또는 학력 차별 문제를 놔둔 채로 여성 차별을 해결할 수 있을까? 어느 사회나 조직이나 나이 차별이 심할수록 여성 차별도 심하고, 학력 차별이 심할수록 장애인 차별이나, 성소수자 차별도 심하다. 차별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여러 갈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온다.
성별에 상관없이 교육에 접근할 권리는 중요한 인권이다. 그리고 대학의 간판, 학력은 여성을 지켜 주는 힘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학력주의의 문제가 같이 내재되어 있다. 더 나아가 서열화와 연고주의의 권력이 그 간판을 만들어 왔다. 학력이 성차별을 막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권력화된 학력으로 차별을 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문화인류학자 김현경은 현재 한국 사회는 학력주의가 약화되면서 연고주의와 서열화가 오히려 심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학을 나왔느냐보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더 중요해졌고(서열화) 평준화 이후 사라지는 듯했던 ‘고등학교 연줄’을 다시 따지기 시작했다(연고주의)고 말이다.(김현경, “학력주의의 종말”, 〈한겨레〉, 2019년 5월 16일.) 학력주의, 서열화, 연고주의 그리고 자본주의가 합쳐진 지금의 사회에서 대학은 자원이다. 어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그 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기를 쓰고 용을 쓴다. 물론 이것은 있는 자들의 싸움이다. 달리 말하면, 애초에 대학을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은 낄 수 없는 싸움이다.
현재의 대학은 이 학력주의, 서열화, 연고주의의 체제, 그리하여 청소년이 오늘의 시민으로서 오늘을 살지 못하고 본격적인 삶을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연기시키는 삶을 만드는 교육 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다. 대학을 위한 지금의 교육은 또 다른 차별을 무수히 만들고 있고 청소년의 인간다운 삶을 박탈한다. 여성이 교육권을 박탈당한 역사가 있다고 해서, 지금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제로섬’의 싸움을 미화시키는 것은 부적절하다. 또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더더욱 대학에 가야만 한다면, 그것은 다른 의미로 여성에게 대학교육은 온전한 선택이 되지 못하고 교육을 권리로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게다가 지금의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라는 지표는 더 이상 크게 유의미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대학 진학 자체보다는 어떤 대학에 들어가는지를 더 세밀하게 봐야 한다. 왜 여성은 유독 교대, 간호대에 많이 진학하는지, 왜 이공계에 진학하는 여성의 비율은 현저히 떨어지는지 말이다. 이는 여성의 교육 접근권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여성의 노동과 직업의 문제 등을 함께 바꿔야만 해결할 수 있는 현상이다. 여성이 다양한 진로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사회, 어떤 직종에서 일하든 삶의 질이 높은 사회는 곧 청소년이 제대로 된 배움을 누릴 권리, 유예하지 않는 삶을 누릴 권리, 대학이 정말로 선택지가 될 수 있는 사회이기도 하다. 학력 차별과 여성 차별은 같이 가기 때문이다.
여성은 단일한 이름 안에 묶일 수 없다. 여성의 경험은 시대와 국경을 관통하는 보편성을 가지지만 동시에 한날한시 같은 지역에서 태어나더라도 완전히 상반될 수 있는 개별성을 지닌다. 언제부터인가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 여성이 더 높은 학벌과 갖가지 능력을 갖추고 ‘성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여성의 학벌과 능력이, 페미니스트의 자격처럼 비치기도 한다. 그때마다 사회로부터 ‘배우지 못한 자’라고 여겨지는 이의 페미니즘은 매번 검증받고 허락받아야 하고, 과소평가된다. 그의 ‘배우지 못함’은 더 노력하지 않은, 남자들과 싸우지 못한, 스스로를 몰아세울 만큼 강하지 못한 결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과를 전공하지 못한, ‘인서울’ 하지 못한, 대학 밖의 내가 저학력의 여성이기 때문에 얕보인다면, 내 존재가 인정받지 못한다면,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발언하지 못하고,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견을 말하기 주저하게 된다면, 그건 더더욱 우리에게 ‘배우지 못한’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배움과 배우지 못함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야 할 이유가 되지 않을까?
앞서 영 페미니스트로 대표되는 인물상이 서울 지역 대학을 다니는 여학생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과연 영영 페미니스트, 지금 떠오르는 페미니스트들의 얼굴은 누구일까 궁금해졌다. 여전히 서울 지역 대학생과 4년제 대학 졸업자에만 머물러 있어선 안 될 거 같다. 최근 성폭력 상담 관련 자격증을 따기 위해 강의를 수강해도 대졸자가 아니면 자격증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비단 페미니즘 운동 내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대학 중심 문화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시대는 이미 PC 통신에서 초고속 인터넷망으로 넘어갔다. 페미니즘의 근거지와 주체들도 더 넓어졌다. 더 많은 여성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기 위해, 여성의 언어가 곧 대졸자의 언어로 점철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겐 대학 밖 페미니스트와 주변부로 밀려난 저학력 여성을 위한 페미니즘 담론이 필요하다. 대학거부의 페미니즘, 학력 차별에 반대하는 페미니즘, 배움과 배우지 않음의 경계를 묻는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길 바란다.
▲ 2020년 7월 4일 투명가방끈이 연 '여성으로 대학에 가지 않는 삶에 대하여 - 여성과 대학거부 수다회' 홍보물
오늘의 교육 제57호 (2020년 7·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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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지 못한’ 페미니즘
- 페미니즘 운동 속 대학거부자의 언어
윤서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활동가.
2018년부터 페미니즘 운동과 대학거부 운동을 함께하고 있다.
오랫동안 여성의 고등교육 진학률은 성평등의 한 요소로 여겨졌다. 여성이 교육에 얼마나 접근할 수 있는지는, 적어도 그만큼의 기회 평등이 실현되었음을 보여 주는 지표였다. 많은 나라들에서 그랬듯 한국에서도 여성은 교육의 기회에서 배제되어 왔다. 대학교육은커녕 의무 교육조차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대학보다 결혼, 출산, 육아가 먼저였고 손위·손아래 남자 형제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대느라 딸 여럿이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가는 경우가 발에 채도록 흔했다. 그러다 시집을 가면 한 여성의 인생에서 배움은 완전히 끊겼다. 2003년 없어진 이화여자대학교의 금혼 학칙을 생각해 보라. 20세기 초, 졸업하기도 전에 팔려 가듯 시집갔던 소녀들을 위해 학교에선 결혼하지 않은 여성만이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결혼은 여성의 교육과 지적 성장을 막는 큰 방해물 중 하나였다. 금혼 학칙은 여학생이 결혼을 늦추고 대학교육을 지속할 수 있는 명분이 되어 주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고, 남성 중심의 교육에서 소외된 여성을 위하여 만들어졌던 여성대학이 ‘역차별’ 논란을 만들어 내는 지금에 이르렀다. 더 이상 여성 다수에게 대학은 싸워서 얻어야 할 것이 아니게 되었다. 나의 할머니 세대에는 대학을 간 사람이 극히 드물었지만, 어머니 세대에는 반 이상이 대학에 진학했고, 내 또래는 10명 중 7명이 대학에 간다. 여남 상관없이 그렇다. 오히려 현재는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여성이 더 우수한 성적을 내며, 2008년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남성을 앞선 이후 매해 여성이 남성에 비해 5%가량 더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그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이제 여자라고 대학에 못 가는 세상은 끝난 듯 보인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선 상황이 달라진다. 2018년 기준, 여성 고용률은 50.9%, 남성은 70.8%이다. 2018년 여성의 대학 진학률 73.8%에 한참 못 미친다.(“13년째 남학생보다 대학 많이 가는 한국 여학생…고용률은 50%”, 〈중앙일보〉, 2019년 7월 1일.) 이뿐만이랴. 여성은 일을 하면서도 남성 임금의 70%가 안 되는 임금을 받는다. 일하는 햇수도, 시간도 짧고 불안정하다. 30세가 넘어가면 많은 여성들은 그간 쌓아 왔던 일 경험을 중지하고 돌봄의 영역으로 옮겨 간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경우는 훨씬 적었다. 대학에 갔지만, 고용은 불안정한 상황. 역시 여남 구분 없이 벌어지는 문제라지만, ‘모두’에게 해당하는 일이라고 말하기엔 수치로 드러나는 성별 차이가 너무 크다. 그동안 역사 속에서 한국의 여성들은 대학에 가도 같이 학생운동, 민주화운동을 한 남성 동지로부터 어처구니없는 성차별 발언을 듣고, 남성 중심적 조직 문화 속에서 성폭력을 폭력으로 인식하여 제대로 대처하지도 않는 사회에 살고 있었다. 페미니즘 운동에서 대학은 여성들이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모으고, 직접 주도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왔다.
실재하는 기반이 되어 주었던 대학
민주화의 바람이 분 1980년대, 한국 사회에 여성운동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반성폭력 운동이 펼쳐진 1990년대를 지나는 동안, 특히 1990년 중반에 등장하여 2000년대까지 활동한 ‘영 페미니스트young feminist’들은 주로 대학을 기반으로 활약하였다. 이전 세대와는 다른, 새롭고 폭넓은 방식의 운동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진 젊은 페미니스트들. 영 페미니스트를 대표하는 인물상은 주로 서울 지역 대학에 다니는 여성 대학생이었다. 그들은 서울대학교 조교 성희롱 사건(1993년), 이화여자대학교 대동제 고대생 난동 사건(1996년), 연세대학교 한총련 여학우 성추행 사건(1996년) 등 대학가의 성폭력을 고발하고 공론화하는 과정에서 크고 작은 네트워크를 만들고 연대하며 파장을 일으켰다.(김보명(2008), 〈1990년대 대학 반성폭력 운동의 여성주의 정치학〉, 한국여성연구소.) 대학에는 수많은 페미니즘 동아리와 모임이 생겼다 사라졌고, 페미니즘을 알리는 유쾌한 문화제와 영화제가 열렸다. 교지와 저널을 발간하여 페미니즘의 언어와 문화를 기록하고 재생산하였다. 대학가 페미니즘은 그즈음 보급된 PC 통신과 함께 온라인으로 영역을 넓혀 가며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 당시 대학을 기반으로 활동한 영 페미니스트들에게 대학은 단순한 취업을 위한 관문이나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넘어, 처음 페미니즘을 접하고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언어화하고 페미니스트 동료를 만나 대학 네트워크에서 교류할 수 있는 장이 되었을 것이다. 현재에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한 페미니즘 실천과 담론들이 ‘제4의 페미니즘 물결’이라고 불리는 가운데, 페미니즘 운동에서 대학의 역할은 다소 축소되었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오면 대학은 여전히 영영 페미니스트(2015년 이후 나타난 페미니스트들은 이전 세대와 구분을 위해 ‘영영 페미(니스트)’로도 불리고, 온라인에서 태동해 ‘넷페미(net-feminist)’로도 일컬어진다. [“[‘영 페미’ 광장으로 나오다] ① ‘메갈리아’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여성신문〉, 2018년 12월 1일] 참고.)들, 현 1020 페미니스트들에게 실재하는 기반이 되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를 포함한 영영 페미니스트의 대부분은 학교나 가정 등 일상을 살아가는 곳이 아닌 온라인에서 처음 페미니즘을 접한다. 포털 사이트와 실시간 검색어, SNS,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핫한’ 이슈들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한 줌의 페미니즘 이야기들부터 시작한다. 나의 경우에도 2015년 메갈리아의 미러링과 웹툰 작가와 성우의 ‘페미 논란’(곧 ‘메갈 논란’이 된)을 접하면서 처음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논란과 비판, 관심의 발원지인 온라인은 격렬했고, 온라인 밖의 세상은 고요했다.
여성학자 손희정은 2015년의 페미니즘을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라고 표현했다. 그때의 페미니즘은 폭탄 터지듯 ‘붐’을 일으켰다. 페미니즘보다 ‘메갈리아즘’이라고 표현하는 게 어울릴 정도였다. 인터넷은 메갈리아에 대한 욕설과 가짜 정보, 터무니없이 적은 수의 메갈리아 출처 미러링으로 도배되었다. 메갈리아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들이 많았기에, 내가 처음 가졌던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고 입시와 바쁜 일상에 묻혀 사그라지는 듯했다. 친한 친구에게 말하기도 어색한 시간이 지나가고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더 선명한 목소리들이 눈에 보였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적힌 포스트잇은 약간의 불신과 무관심으로 얼어 있던 내 가슴을 녹였고, 나는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메갈리아를 돌아봤고 뉴스 기사에 올라오는 포스트잇의 내용을 살피며 페미니즘 책을 읽었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기분이란 걸 알게 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내게 필요했던 것은 이 폭탄을 함께 껴안을 페미니스트 동료였다. 마땅한 동료를 찾지 못했던 고등학교 3학년, 대학입시거부와 대학 진학 사이에서 고민하던 나는 차라리 여대에 입학해 페미니즘 동아리에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그러면서 남들처럼 대학에 가는 것이 나에게도, 부모에게도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이 아니면 내 일상에서 페미니즘에 더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이 뚜렷이 없어 보였다. 또, 그때 나는 내가 제대로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잘 모른다고 생각해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명명하기를 망설이고 있었다. 제4의 물결이라는 건 왔다는데, 막상 바로 옆에서 이야기해 주고 함께 이야길 나눌 사람이 없었던 탓이었다. 대학에 가서 페미니스트 친구를 사귀고 여성학을 배우면 페미니즘이 자연스레 내 삶에 스며들겠거니, 그럼 나는 당당하게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내가 다음 해 모든 대학에 떨어지고 억지로 시작한 재수를 한 달 만에 관둔 뒤, 11월 쌀쌀한 수능일에 서울 청계광장 앞에서 대학거부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 인생은 정말 모르는 것이다. 심지어 나는 내가 막연히 알고 있던 구체적이고 유일한 방법 ― 여대에 진학해서 페미니즘 동아리 들기 ― 이 아니고도 스스로를 당당히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했다. 대학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페미니스트 동료’들도 그해 온갖 페미니스트 그룹을 찾아가서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찾아가기만 하면 만날 수 있는 것이었다. 청소년기에도 그럴 수 있었겠지만 입시와 불안이 나를 자주 무기력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온라인 안팎의 격렬함과 페미니즘 논의들을 만나고 나니 이제야 나의 페미니즘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나의 질문은, ‘페미니즘 운동에서 대학을 거부한 나의 언어로 무엇을 말할 수 있느냐’이다.
학력 차별과 여성 차별, 틀린 그림 찾기
대학이 자본이라면, 하나라도 더 자원을 얻어 방패로 써야 할 여성들에겐 대학은 ‘선택’보다는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생각될 것이다. 더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보험이나, 쿠션 같은 것. 나와 내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대학은 자주 그렇게 비유되었다. 혹은 대학은 공격할 수 있는 창이 되기도 했다. 학력이란 권력으로 성 권력, 나이 권력, 자본 권력 등을 찍어 누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창으로, 곧 학력 권력으로 성별, 나이, 경제력 등에 대응하는 것은 적절한가? 옳은가? 한 청소년운동 활동가 동료가 내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어린 여성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더 강력한 여성으로 돌아와 당신의 세계를 박살 낼 것이다”라는 페미니즘 운동의 표어에서는 어린 여성의 강함을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어린 여성의 힘을 무시하는 문화가 계속된다면, 강한 어른 여성이 무엇을 부수든 근본적인 것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나이주의, 청소년 보호주의 문제를 놔둔 채로 여성 차별을 해결할 수 있을까? 또는 학력 차별 문제를 놔둔 채로 여성 차별을 해결할 수 있을까? 어느 사회나 조직이나 나이 차별이 심할수록 여성 차별도 심하고, 학력 차별이 심할수록 장애인 차별이나, 성소수자 차별도 심하다. 차별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여러 갈래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온다.
성별에 상관없이 교육에 접근할 권리는 중요한 인권이다. 그리고 대학의 간판, 학력은 여성을 지켜 주는 힘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학력주의의 문제가 같이 내재되어 있다. 더 나아가 서열화와 연고주의의 권력이 그 간판을 만들어 왔다. 학력이 성차별을 막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권력화된 학력으로 차별을 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문화인류학자 김현경은 현재 한국 사회는 학력주의가 약화되면서 연고주의와 서열화가 오히려 심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학을 나왔느냐보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더 중요해졌고(서열화) 평준화 이후 사라지는 듯했던 ‘고등학교 연줄’을 다시 따지기 시작했다(연고주의)고 말이다.(김현경, “학력주의의 종말”, 〈한겨레〉, 2019년 5월 16일.) 학력주의, 서열화, 연고주의 그리고 자본주의가 합쳐진 지금의 사회에서 대학은 자원이다. 어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그 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기를 쓰고 용을 쓴다. 물론 이것은 있는 자들의 싸움이다. 달리 말하면, 애초에 대학을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은 낄 수 없는 싸움이다.
현재의 대학은 이 학력주의, 서열화, 연고주의의 체제, 그리하여 청소년이 오늘의 시민으로서 오늘을 살지 못하고 본격적인 삶을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연기시키는 삶을 만드는 교육 체제를 공고히 하고 있다. 대학을 위한 지금의 교육은 또 다른 차별을 무수히 만들고 있고 청소년의 인간다운 삶을 박탈한다. 여성이 교육권을 박탈당한 역사가 있다고 해서, 지금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제로섬’의 싸움을 미화시키는 것은 부적절하다. 또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 더더욱 대학에 가야만 한다면, 그것은 다른 의미로 여성에게 대학교육은 온전한 선택이 되지 못하고 교육을 권리로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게다가 지금의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라는 지표는 더 이상 크게 유의미하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대학 진학 자체보다는 어떤 대학에 들어가는지를 더 세밀하게 봐야 한다. 왜 여성은 유독 교대, 간호대에 많이 진학하는지, 왜 이공계에 진학하는 여성의 비율은 현저히 떨어지는지 말이다. 이는 여성의 교육 접근권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여성의 노동과 직업의 문제 등을 함께 바꿔야만 해결할 수 있는 현상이다. 여성이 다양한 진로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사회, 어떤 직종에서 일하든 삶의 질이 높은 사회는 곧 청소년이 제대로 된 배움을 누릴 권리, 유예하지 않는 삶을 누릴 권리, 대학이 정말로 선택지가 될 수 있는 사회이기도 하다. 학력 차별과 여성 차별은 같이 가기 때문이다.
여성은 단일한 이름 안에 묶일 수 없다. 여성의 경험은 시대와 국경을 관통하는 보편성을 가지지만 동시에 한날한시 같은 지역에서 태어나더라도 완전히 상반될 수 있는 개별성을 지닌다. 언제부터인가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 여성이 더 높은 학벌과 갖가지 능력을 갖추고 ‘성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여성의 학벌과 능력이, 페미니스트의 자격처럼 비치기도 한다. 그때마다 사회로부터 ‘배우지 못한 자’라고 여겨지는 이의 페미니즘은 매번 검증받고 허락받아야 하고, 과소평가된다. 그의 ‘배우지 못함’은 더 노력하지 않은, 남자들과 싸우지 못한, 스스로를 몰아세울 만큼 강하지 못한 결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과를 전공하지 못한, ‘인서울’ 하지 못한, 대학 밖의 내가 저학력의 여성이기 때문에 얕보인다면, 내 존재가 인정받지 못한다면,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발언하지 못하고,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의견을 말하기 주저하게 된다면, 그건 더더욱 우리에게 ‘배우지 못한’ 페미니즘이 필요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배움과 배우지 못함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야 할 이유가 되지 않을까?
앞서 영 페미니스트로 대표되는 인물상이 서울 지역 대학을 다니는 여학생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과연 영영 페미니스트, 지금 떠오르는 페미니스트들의 얼굴은 누구일까 궁금해졌다. 여전히 서울 지역 대학생과 4년제 대학 졸업자에만 머물러 있어선 안 될 거 같다. 최근 성폭력 상담 관련 자격증을 따기 위해 강의를 수강해도 대졸자가 아니면 자격증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비단 페미니즘 운동 내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대학 중심 문화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시대는 이미 PC 통신에서 초고속 인터넷망으로 넘어갔다. 페미니즘의 근거지와 주체들도 더 넓어졌다. 더 많은 여성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기 위해, 여성의 언어가 곧 대졸자의 언어로 점철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겐 대학 밖 페미니스트와 주변부로 밀려난 저학력 여성을 위한 페미니즘 담론이 필요하다. 대학거부의 페미니즘, 학력 차별에 반대하는 페미니즘, 배움과 배우지 않음의 경계를 묻는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길 바란다.
▲ 2020년 7월 4일 투명가방끈이 연 '여성으로 대학에 가지 않는 삶에 대하여 - 여성과 대학거부 수다회' 홍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