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저널 플랜P 2023년 봄호(11호)] 대학 밖에서 손을 잡자!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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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밖에서 손을 잡자!

 

글 연혜원 (투명가방끈 활동가)

 

 

“수능 거부 후(->삭제) 12년 후 뭐하고 사시나 봤더니ㅠㅠ 대학거부가 직업이 되셨음. 12년째 학력차별반대 운동 등의 시민운동하고 계심.”

ㄴ “생산적인 일 좀 하시라...”

ㄴ “세상에 이제 저것 밖에 못하게 됐구나.. 대학 쓸모없다 생각했는데 중요하네.”

 

지난 1월 연합뉴스에 올라온 투명가방끈 활동가 ‘난다’와 ‘둠코’를 인터뷰 한 기사 <수능 거부 후 12년…“대학 합격여부가 자기 가치 결정하지 않아”>에 위와 같은 트위터 댓글들이 달렸다. 그 댓글들을 읽으면서 대학을 거부하고 살아가는 것을 10년 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많은 사람들을 아주 단단히 화나게 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한국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입학하고, 졸업한 대학을 자신의 ‘간판’으로 삼고 평생의 자랑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과 비교해봤을 때, 상당히 모순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투명가방끈’을 둘러싼 편견이 가진 의미

 

투명가방끈 활동가들은 자주 활동가의 나이에 대한 편견과 만나게 된다. 투명가방끈이 학력 학벌과 대학 중심주의에 저항하는 활동을 하는 단체라는 설명을 들으면 대개가 투명가방끈 활동가들은 청소년이거나 이십 대 초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십 대가 지난 활동가들의 나이를 알게 되면 당황해할 때가 많다. 심지어 인권활동가라고 해도 말이다. 삼십 대가 되어서도 대학거부와 대학거부가 가진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활동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는 장면들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이 사회에서 이십 대 이후의 대학비진학자의 삶 자체가 상당히 비가시화되어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와 연결되는 지점에서 대학비진학자가 당면하게 되는 다양한 차별들은 이십 대에 그치지 않는데,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대학비진학자가 받는 차별은 차별이라고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 강력한 학력 사회인가 하는 질문이다. 세 번째는 많은 사람이 청소년의 문제와 비청소년의 문제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결국 많은 사람이 학력주의 및 학벌주의를 둘러싼 문제가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구조적 문제와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모르고 있고, 그에 따라서 교육의 문제가 그 교육의 대상인 특정 연령집단에만 국한된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비단 투명가방끈 외부에 있는 사람들만이 가진 편견이 아닌 것 같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많은 대학비진학 당사자들도 소위 ‘나이 먹어서’ 자신들이 과거에 학교 안에서 느꼈던 부당함이나 학력주의 및 학벌주의 사회에서 분투했던 경험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어려운 일로 느낀다. 이렇게 투명가방끈 활동가들의 나이에 대한 편견들이 가진 다양한 의미는 투명가방끈을 둘러싼 당사자성과 비당사자성 사이의 구획이 끊임없이 구성되고 생산되는 역동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대학거부선언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투명가방끈은 2011년, 대학거부선언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됐다. 현재까지 개개인의 정기후원과 일시후원, 그리고 원고료와 같은 활동가들의 활동 관련 수입으로 운영되어 오고 있다. 투명가방끈은 차별금지법제정연대와 청소년시민전국행동(구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과 함께 연대하며, 경쟁과 차별 중심의 교육과 사회를 바꾸기 위해 함께 의제를 발굴해 나가는 책 모임, 토론회 개최 등 다양한 활동들을 진행해왔다. 연대 활동뿐 아니라 투명가방끈 내 사회주택팀은 ‘다다다 협동조합’으로 발전해 ‘DA(다)같이 사는 집’을 운영하면서 기존의 주거 정책 대상에서 밀려난 대학비진학자들의 주거권을 고민하고, 이들의 사회적 고립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2022년에는 제1회 대학비진학자 가시화 주간 “대학 밖에서 손을 잡자!”를 선포하고 수능 당일 오픈 마이크 행사를 진행했다. 이렇게만 보아도 한 사람의 대학거부를 지지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오랜 시간 많은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학을 거부하는 것이 대학거부선언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선언’이라는 것이 지닌 정치적인 의미처럼, 선언 이후에도 대학 중심 사회를 바꾸어 나가기 위해 필요한 지속적인 과정의 시간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대학거부 선언자들이 투명가방끈에 남아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흩어져있는 대학거부선언자들, 그리고 대학거부선언을 하지는 않았으나 대학비진학자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이들과 앞으로의 새로운 연결고리를 상상하는 것 또한 투명가방끈이 안고 가야 할 고민이기도 하다. 대학을 중심으로 네트워크 권력이 작동하는 한국 사회에서 대학비진학자들 간의 연대는 변화의 중요한 시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경쟁하지 않는 교육을 꿈꾸며

 

투명가방끈에게 ‘대학을 거부한다’는 선언을 하면서까지 이토록 집요하게 입시경쟁을 문제 삼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줄 세우는 학교와 교육, 나아가 이 사회를 더 이상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나아가 끈질기게 승자와 패자를 나누고 서열을 매기는 교육을, 모두를 위한 교육으로 되찾아오고 싶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학교와 교육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위계질서에 질문하고, 대학이 독점하고 있는 교육의 권력에 불복종하는 삶을 위한 다양한 안전망 만들기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가 작은 사회라면, 이 사회는 학교의 거대한 연장선상이다. 투명가방끈이 12년 동안 활동 해오고 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학교에서 평등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배우기 이전에 경쟁하는 법을 먼저 학습하고, 그러면서 필연적으로 강자가 되기 위해 누군가를 약자로 만드는 법부터 배운다. 그런 학교를 경유하면서 사람들은 학교 졸업장에 따라 타인을 차별하고, 타인의 권리에 차등을 두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고, 경쟁하지 않고 살아가는 법은 모른 채 삶을 살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이 구조 안에서 교육이라는 체제를 매개로 나이와 학력, 학벌, 그리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과하며 모두가 아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투명가방끈의 당사자는 쉬이 대학비진학자라고만 생각할 수 있지만, 모두가 이 구조에 연루되어 있다는 점에서 모든 시민은 다양한 위치에서 투명가방끈의 당사자들이다. 투명가방끈이 지향하는 것은 학력·학벌 차별에 저항하기 위해 당사자와 비당사자를 첨예하게 구분 짓고, 입시경쟁구조의 피해자와 가해자로 편가르기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자신이 놓여있는 다양한 위치에서 경쟁하지 않는 교육으로의 전환을 위한 구체적인 고민을 하는 것이다.

 

함께 뿌리 내리는 교육을 위해

 

대학거부선언을 둘러싼 또 다른 편견이 있다면 대학거부선언이 대학을 가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안타깝게도 대학거부선언은 그런 것이 아니다. 대학거부선언자들의 삶은 끊임없이 불안하고 휘청거리며 흔들린다. 하지만 대학진학자들의 삶 또한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어차피 모두 다른 이유로 흔들리면서 산다. 그럼에도 유독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사람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들, 대학입시체제 자체에 질문하는 사람들의 삶이 더 휘청일 수밖에 없고, 이들이 이 사회 안에서 더 자주 휘청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면, 투명가방끈은 그들을 향해 앞으로도 계속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할 것이다. 모두가 흔들려도 다시 일어설 수 있기 위해서는 각자의 삶이 이 사회에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게, 학교에서부터 옆 사람을 밟고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옆 사람과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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