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는 우리의 힘
연혜원
투명가방끈 활동가
지난 6월 24일 <라디오스타>에 김민경 편집자가 출연해 친오빠와 자신이 졸업한 대학을 자랑한 것을 두고 트위터(현 X)에서 말이 많았다. 김민경 편집자가 친오빠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로스쿨을 나와 유명 로펌에 근무하고 있는 것과, 본인이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것을 자랑한 것을 두고 두 사람의 학벌을 치켜세우는 사람들과 학벌주의 사회에서 학벌을 자랑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 공방이 오간 것이다. 공방의 끝에는 학벌 자랑을 비판하는 것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행위라고 비꼬는 글들이 있었다.(본인을 페미니스트라고 칭하는 많은 트위터 계정들이, 여자가 학벌 좀 자랑할 수 있는 거 아니냐며 비아냥댔지만, 학벌주의가 대표적인 능력주의는 인종주의와 마찬가지로 페미니즘과 가치를 함께 하는 개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면의 분량상 이에 대해서는 자세한 논의를 생략하겠다.)
학벌 자랑은 언제부터 방송의 주요 콘텐츠가 됐을까? 그리고 학벌 자랑을 비판하는 것이 열등감에 사로잡힌 행위라면,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까?
명문대를 졸업한 연예인들이 학벌을 자기 어필의 수단으로 삼아온 것은 물론이고, 방송이 출연자의 학벌을 콘텐츠로 삼아온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수능 성적 자체가 방송 콘텐츠가 된 지도 오래다. <유퀴즈>는 올해 초 아예 수능 만점자들을 초대하여 그들을 인터뷰하며 특별한 존재로 부각했다. 이렇게 유구하게 학벌로 출연자의 특별함을 강조하는 것을 콘텐츠로 삼는 문화 속에서 김민경 편집자가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본인과 친오빠의 학벌을 자랑한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반복되는 학벌 콘텐츠를 언제까지 당연한 문화로 용인하고 묵인해야 하는 것인지 함께 논의해봐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학벌을 자랑하는 콘텐츠가 왜 문제일까?
누군가 자신의 학력을 소개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학벌이 여전히 한 사람의 지능과 성실함, 심지어 인간적인 가치까지 증명하는 가장 손쉬운 언어로 소비된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방송은 출연자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대학 이름을 호출하고, 시청자는 그 이름만으로 그 사람의 능력과 성공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학벌은 단순한 이력이 아니라 권위와 신뢰를 부여하는 상징자본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는 대학 입시를 이미 끝낸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방송에서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 학벌 콘텐츠는 지금도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결국 사람의 가치는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로 결정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한다. 대학은 교육기관을 넘어 개인의 우열을 가르는 서열이 되고, 사람들은 그 서열을 자신의 자존감과 타인의 존엄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내면화한다.
그래서 학벌 자랑은 개인의 취향이나 유머로만 볼 수 없다. 그것은 학벌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다. 누군가는 자신의 대학을 자랑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부러워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대학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긴다. 이 과정에서 학벌은 끊임없이 사회적 효력을 확인받고 재생산된다.
많은 사람들이 학벌 자랑을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을 공격할 때, 이들에게 “열등감”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하지만 학벌 자랑을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에게 "열등감"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문제를 개인의 감정으로 축소하는 일이다. 사람들이 학벌주의를 열등감에 의해서만 비판하는 것은 아님이 자명하다. 하지만 실제로 열등감을 느꼈다 하더라도 이것은 조롱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실제로 사람들이 학벌 앞에서 열등감을 느낀다면, 오히려 질문해야 할 것은 왜 많은 사람들이 특정 학벌 앞에서 열등감을 경험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가이다. 많은 사람들이 특정 학벌 앞에서 열등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개인이 열등해서가 아니라, 대학 서열을 통해 사람의 가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열등감은 개인의 결함이라기보다 서열화된 사회가 만들어낸 감정이기 때문이다.
차별받는 사람에게 차별을 경험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해서는 안 된다면, 학벌주의가 만들어낸 열등감 또한 개인의 질투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의 불편함을 조롱하는 순간, 우리는 학벌주의 자체를 비판할 기회를 잃을 것이다.
그렇다면 열등감은 극복해야만 하는 감정일까.
나는 오히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열등감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열등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함께 묻는 일이다. 내가 왜 저 사람 앞에서 작아지는지, 왜 특정 대학 이름 하나에 위축되는지, 왜 누군가의 성공이 나의 실패처럼 느껴지는지를 질문하기 시작할 때 열등감은 더 이상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사회를 읽는 감각이 된다.
사회운동은 언제나 이러한 감정에서 시작되어 왔다.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이 자신을 무능한 개인이 아니라 착취당하는 존재로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가능해졌다. 여성운동은 여성들이 자신의 불안과 분노를 개인의 예민함이 아니라 구조적 차별의 결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확장되었다. 장애운동 역시 개인의 불편을 사회가 만든 장벽의 문제로 바꾸어 읽으면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왔다.
학벌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나는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정신승리가 아니다. 오히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학벌 앞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는가"를 함께 질문하는 일이다. 개인의 열등감을 사회의 문제로 번역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부끄러운 감정이 아니라 사회를 바꾸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따라서 열등감의 해법은 열등감을 없애는 데 있지 않다. 열등감을 서로의 실패로 경쟁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설명할 수 있는 경험으로 만드는 데 있다. 사회운동은 바로 그 번역의 기술이다. 혼자 견뎌야 했던 감정을 공적인 언어로 바꾸고, 개인의 수치심을 공동의 질문으로 전환하는 것이 정치라면, 학벌주의에 대한 저항도 감정을 재배치하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질투는 우리의 힘
연혜원
투명가방끈 활동가
지난 6월 24일 <라디오스타>에 김민경 편집자가 출연해 친오빠와 자신이 졸업한 대학을 자랑한 것을 두고 트위터(현 X)에서 말이 많았다. 김민경 편집자가 친오빠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로스쿨을 나와 유명 로펌에 근무하고 있는 것과, 본인이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것을 자랑한 것을 두고 두 사람의 학벌을 치켜세우는 사람들과 학벌주의 사회에서 학벌을 자랑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 공방이 오간 것이다. 공방의 끝에는 학벌 자랑을 비판하는 것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행위라고 비꼬는 글들이 있었다.(본인을 페미니스트라고 칭하는 많은 트위터 계정들이, 여자가 학벌 좀 자랑할 수 있는 거 아니냐며 비아냥댔지만, 학벌주의가 대표적인 능력주의는 인종주의와 마찬가지로 페미니즘과 가치를 함께 하는 개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면의 분량상 이에 대해서는 자세한 논의를 생략하겠다.)
학벌 자랑은 언제부터 방송의 주요 콘텐츠가 됐을까? 그리고 학벌 자랑을 비판하는 것이 열등감에 사로잡힌 행위라면,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까?
명문대를 졸업한 연예인들이 학벌을 자기 어필의 수단으로 삼아온 것은 물론이고, 방송이 출연자의 학벌을 콘텐츠로 삼아온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수능 성적 자체가 방송 콘텐츠가 된 지도 오래다. <유퀴즈>는 올해 초 아예 수능 만점자들을 초대하여 그들을 인터뷰하며 특별한 존재로 부각했다. 이렇게 유구하게 학벌로 출연자의 특별함을 강조하는 것을 콘텐츠로 삼는 문화 속에서 김민경 편집자가 <라디오스타>에 출연해 본인과 친오빠의 학벌을 자랑한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반복되는 학벌 콘텐츠를 언제까지 당연한 문화로 용인하고 묵인해야 하는 것인지 함께 논의해봐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학벌을 자랑하는 콘텐츠가 왜 문제일까?
누군가 자신의 학력을 소개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학벌이 여전히 한 사람의 지능과 성실함, 심지어 인간적인 가치까지 증명하는 가장 손쉬운 언어로 소비된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방송은 출연자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대학 이름을 호출하고, 시청자는 그 이름만으로 그 사람의 능력과 성공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학벌은 단순한 이력이 아니라 권위와 신뢰를 부여하는 상징자본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는 대학 입시를 이미 끝낸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방송에서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 학벌 콘텐츠는 지금도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결국 사람의 가치는 어느 대학을 나왔는가로 결정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한다. 대학은 교육기관을 넘어 개인의 우열을 가르는 서열이 되고, 사람들은 그 서열을 자신의 자존감과 타인의 존엄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내면화한다.
그래서 학벌 자랑은 개인의 취향이나 유머로만 볼 수 없다. 그것은 학벌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다. 누군가는 자신의 대학을 자랑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부러워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대학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긴다. 이 과정에서 학벌은 끊임없이 사회적 효력을 확인받고 재생산된다.
많은 사람들이 학벌 자랑을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을 공격할 때, 이들에게 “열등감”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하지만 학벌 자랑을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에게 "열등감"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문제를 개인의 감정으로 축소하는 일이다. 사람들이 학벌주의를 열등감에 의해서만 비판하는 것은 아님이 자명하다. 하지만 실제로 열등감을 느꼈다 하더라도 이것은 조롱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실제로 사람들이 학벌 앞에서 열등감을 느낀다면, 오히려 질문해야 할 것은 왜 많은 사람들이 특정 학벌 앞에서 열등감을 경험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가이다. 많은 사람들이 특정 학벌 앞에서 열등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개인이 열등해서가 아니라, 대학 서열을 통해 사람의 가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열등감은 개인의 결함이라기보다 서열화된 사회가 만들어낸 감정이기 때문이다.
차별받는 사람에게 차별을 경험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해서는 안 된다면, 학벌주의가 만들어낸 열등감 또한 개인의 질투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의 불편함을 조롱하는 순간, 우리는 학벌주의 자체를 비판할 기회를 잃을 것이다.
그렇다면 열등감은 극복해야만 하는 감정일까.
나는 오히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열등감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열등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함께 묻는 일이다. 내가 왜 저 사람 앞에서 작아지는지, 왜 특정 대학 이름 하나에 위축되는지, 왜 누군가의 성공이 나의 실패처럼 느껴지는지를 질문하기 시작할 때 열등감은 더 이상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사회를 읽는 감각이 된다.
사회운동은 언제나 이러한 감정에서 시작되어 왔다.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이 자신을 무능한 개인이 아니라 착취당하는 존재로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가능해졌다. 여성운동은 여성들이 자신의 불안과 분노를 개인의 예민함이 아니라 구조적 차별의 결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확장되었다. 장애운동 역시 개인의 불편을 사회가 만든 장벽의 문제로 바꾸어 읽으면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왔다.
학벌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나는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정신승리가 아니다. 오히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학벌 앞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는가"를 함께 질문하는 일이다. 개인의 열등감을 사회의 문제로 번역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부끄러운 감정이 아니라 사회를 바꾸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
따라서 열등감의 해법은 열등감을 없애는 데 있지 않다. 열등감을 서로의 실패로 경쟁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설명할 수 있는 경험으로 만드는 데 있다. 사회운동은 바로 그 번역의 기술이다. 혼자 견뎌야 했던 감정을 공적인 언어로 바꾸고, 개인의 수치심을 공동의 질문으로 전환하는 것이 정치라면, 학벌주의에 대한 저항도 감정을 재배치하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