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야기를 선택하고 선호할 것인가 🤡
공현
“대학 거부한다고 나대더니 나중에 보면 다들 대학 갔더라.”
투명가방끈 활동을 하면서 대충 두 번째 정도로 자주 듣게 되는 비난이다.(참고로 으뜸은 ‘쟤네 공부 못해서, 능력 없어서 저러는 거다’.) 변주도 꽤 다양하다. 그냥 대학도 아니고 ‘인서울 명문대’를 갔다느니, 논술로 갔다느니 이런저런 디테일이 붙는다.
그런 소릴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조사하여 몇 %나 대학에 진학했는지를 집계해본 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한두 사례를 보고 느낌적 느낌이나 인상평으로 하는 말들이거나, 그냥 ‘뇌피셜’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래서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투명가방끈 활동가들 또는 대학거부선언자들의 실제 학력이 아니다. 사람들은 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 하는지이다.
익숙한 반전의 맛?
내 생각에, 이런 류의 서사는 원래 좀 인기가 많았다. 착한 척하던 사람이 사실 나쁜 놈이었다거나, 선하려고 애쓰던 사람이 세상에 꺾였다거나 하는 건 클리셰 중의 클리셰다. 더 세분화해보면 ‘도덕 교과서 같은 소리 하던 사람이 사실 뒤로는 자기 이익만 추구하더라.’ 같은 ‘위선’의 서사, ‘민주화 투사이던 사람이 시간이 흘러서 권력에 부역하더라’ 같은 ‘변절’, ‘타락’의 서사 등이 있겠다. 나는 이 목록에 ‘젊을 때는 좌파인 게 당연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좌파면 바보다’ 같은 식의 ‘철없음’, ‘중2병’ 서사도 덧붙이고 싶다.
예컨대, 3.1운동 당시의 ‘민족대표 33인’ 중 대부분이 변절하고 친일파가 됐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어본 분들이 있을 게다. 한때 인터넷과 언론 등을 통해 널리 퍼졌던 이 이야기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민족대표 33인 중 대부분은 계속 독립운동을 하거나 탄압에 스러졌고, 변절한 경우는 한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이문영, [팩트체크] 3.1운동 민족대표 모두 친일? 변절자는 5명 뿐, 뉴스톱, 2019년 12월 9일) 그런데 사람들은 ‘한 명 빼고 다 변절했다’는 말을 믿고 퍼뜨리거나, 변절한 한두 명에만 주목한다. 다 변절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더 비극적이고, 놀랍고, 자극적으로 느껴지며, 사람들의 어떤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런 반전 자체가 가진 근본적 재미도 있기야 하다. 그래도 이런 식의 이야기가 널리 통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이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 및 이야기 구조와 잘 호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고 자기 이익을 추구한다는 이데올로기, 체제에 대한 저항이나 거부는 꺾이기 마련이라는 무력감, 세상을 비판하고 투쟁하는 사람들도 별다를 것 없는 속물이라는 냉소 등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저 사람처럼 하지 못하는 나’에게도 면죄부를 준다는 장점이 있다. 체제에 순응하는 나 자신의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게 하고, 성찰과 저항을 무의미하게 여기게 한다. 행동에 나서는 사람들을 평가하고 손가락질하기만 하기 딱 좋은, ‘관객’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다.
우리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최근에 읽은 책(자미라 엘 우아실, 프리데만 카릭 씀,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원더박스)에서 우리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이야기/내러티브고, 이야기를 변화시키는 것이 삶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을 봤다. 그렇다. 우리는 이 복잡한 현실을 구도화된 이야기로 설명하고 이해하고 싶어 한다. 그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인지에 따라 우리가 원하고 만들려 하는 결말도 달라질 것이다.
나의 삶을 어떤 이야기로 만들고 싶은지는 우리가 멋지고 재미있고 의미있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질문이다. 또,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 것인지,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회자할 것인지는 운동적으로도 판단해야 할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대학거부자들 다 대학 갔더라’ 하는 냉소와 변절의 서사를 좋아하며 이야기하고 다니는 것은 그 자체가 보수반동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남들을 그렇게 흉보기 이전에, 경쟁교육과 학력학벌차별, 능력주의 등에 관해 자신은 어떤 이야기를 만들 것인지부터 돌아볼 문제라고 하고 싶다.
그래서 정말로 투명가방끈 사람들 다들 ‘인서울 명문대’를 갔느냐고? 일단 투명가방끈을 거쳐갔거나 현재 있는 주요 활동가 중 다수는 계속 중졸·고졸이다. 나는 대학거부선언을 한 뒤 대학에 가지 않고 자기의 진로 속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는 사람을 십수 명은 댈 수 있다. 입시경쟁과 대학서열 등을 비판하고서 제도권 밖 대안대학에 가거나 대학이 평준화된 나라의 협동조합 대학에 들어간 사례도 있는데, 이런 경우를 죄다 ‘대학 갔다더라’ 한마디로 비난할 수 있는지 또한 의문이다. 뭐, 나름의 삶의 궤적과 고민 속에서 나중에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더라도 그게 곧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말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나는 ‘다들 인서울 명문대 갔다더라’ 하는 식의 변절과 위선의 서사 말고, 계속 대학비진학자인 채로 인권운동/노동운동/시민운동을 한다는 뚝심과 투쟁의 서사를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투명가방끈이 운동 목표와 방법을 토론한 끝에 ‘대학거부선언’에 무게를 두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운동하기로 한 지가 벌써 5년도 더 됐다는 점도 좀 기억해주시면 좋겠고.
어떤 이야기를 선택하고 선호할 것인가 🤡
공현
“대학 거부한다고 나대더니 나중에 보면 다들 대학 갔더라.”
투명가방끈 활동을 하면서 대충 두 번째 정도로 자주 듣게 되는 비난이다.(참고로 으뜸은 ‘쟤네 공부 못해서, 능력 없어서 저러는 거다’.) 변주도 꽤 다양하다. 그냥 대학도 아니고 ‘인서울 명문대’를 갔다느니, 논술로 갔다느니 이런저런 디테일이 붙는다.
그런 소릴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조사하여 몇 %나 대학에 진학했는지를 집계해본 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한두 사례를 보고 느낌적 느낌이나 인상평으로 하는 말들이거나, 그냥 ‘뇌피셜’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래서 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투명가방끈 활동가들 또는 대학거부선언자들의 실제 학력이 아니다. 사람들은 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 하는지이다.
익숙한 반전의 맛?
내 생각에, 이런 류의 서사는 원래 좀 인기가 많았다. 착한 척하던 사람이 사실 나쁜 놈이었다거나, 선하려고 애쓰던 사람이 세상에 꺾였다거나 하는 건 클리셰 중의 클리셰다. 더 세분화해보면 ‘도덕 교과서 같은 소리 하던 사람이 사실 뒤로는 자기 이익만 추구하더라.’ 같은 ‘위선’의 서사, ‘민주화 투사이던 사람이 시간이 흘러서 권력에 부역하더라’ 같은 ‘변절’, ‘타락’의 서사 등이 있겠다. 나는 이 목록에 ‘젊을 때는 좌파인 게 당연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좌파면 바보다’ 같은 식의 ‘철없음’, ‘중2병’ 서사도 덧붙이고 싶다.
예컨대, 3.1운동 당시의 ‘민족대표 33인’ 중 대부분이 변절하고 친일파가 됐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어본 분들이 있을 게다. 한때 인터넷과 언론 등을 통해 널리 퍼졌던 이 이야기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민족대표 33인 중 대부분은 계속 독립운동을 하거나 탄압에 스러졌고, 변절한 경우는 한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이문영, [팩트체크] 3.1운동 민족대표 모두 친일? 변절자는 5명 뿐, 뉴스톱, 2019년 12월 9일) 그런데 사람들은 ‘한 명 빼고 다 변절했다’는 말을 믿고 퍼뜨리거나, 변절한 한두 명에만 주목한다. 다 변절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더 비극적이고, 놀랍고, 자극적으로 느껴지며, 사람들의 어떤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런 반전 자체가 가진 근본적 재미도 있기야 하다. 그래도 이런 식의 이야기가 널리 통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이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 및 이야기 구조와 잘 호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인간은 원래 이기적이고 자기 이익을 추구한다는 이데올로기, 체제에 대한 저항이나 거부는 꺾이기 마련이라는 무력감, 세상을 비판하고 투쟁하는 사람들도 별다를 것 없는 속물이라는 냉소 등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저 사람처럼 하지 못하는 나’에게도 면죄부를 준다는 장점이 있다. 체제에 순응하는 나 자신의 욕망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게 하고, 성찰과 저항을 무의미하게 여기게 한다. 행동에 나서는 사람들을 평가하고 손가락질하기만 하기 딱 좋은, ‘관객’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다.
우리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최근에 읽은 책(자미라 엘 우아실, 프리데만 카릭 씀,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원더박스)에서 우리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이야기/내러티브고, 이야기를 변화시키는 것이 삶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을 봤다. 그렇다. 우리는 이 복잡한 현실을 구도화된 이야기로 설명하고 이해하고 싶어 한다. 그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인지에 따라 우리가 원하고 만들려 하는 결말도 달라질 것이다.
나의 삶을 어떤 이야기로 만들고 싶은지는 우리가 멋지고 재미있고 의미있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질문이다. 또,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 것인지,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회자할 것인지는 운동적으로도 판단해야 할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대학거부자들 다 대학 갔더라’ 하는 냉소와 변절의 서사를 좋아하며 이야기하고 다니는 것은 그 자체가 보수반동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남들을 그렇게 흉보기 이전에, 경쟁교육과 학력학벌차별, 능력주의 등에 관해 자신은 어떤 이야기를 만들 것인지부터 돌아볼 문제라고 하고 싶다.
그래서 정말로 투명가방끈 사람들 다들 ‘인서울 명문대’를 갔느냐고? 일단 투명가방끈을 거쳐갔거나 현재 있는 주요 활동가 중 다수는 계속 중졸·고졸이다. 나는 대학거부선언을 한 뒤 대학에 가지 않고 자기의 진로 속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는 사람을 십수 명은 댈 수 있다. 입시경쟁과 대학서열 등을 비판하고서 제도권 밖 대안대학에 가거나 대학이 평준화된 나라의 협동조합 대학에 들어간 사례도 있는데, 이런 경우를 죄다 ‘대학 갔다더라’ 한마디로 비난할 수 있는지 또한 의문이다. 뭐, 나름의 삶의 궤적과 고민 속에서 나중에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더라도 그게 곧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말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나는 ‘다들 인서울 명문대 갔다더라’ 하는 식의 변절과 위선의 서사 말고, 계속 대학비진학자인 채로 인권운동/노동운동/시민운동을 한다는 뚝심과 투쟁의 서사를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투명가방끈이 운동 목표와 방법을 토론한 끝에 ‘대학거부선언’에 무게를 두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운동하기로 한 지가 벌써 5년도 더 됐다는 점도 좀 기억해주시면 좋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