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대학이란 무엇인가
대학의 사회적 위상과 가치의 변동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80%를 넘는다. 지난 20년 사이 두 배로 늘어났다. 단순한 사실이지만 그 함의는 결코 적지 않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지나치게 추상적인 질문처럼 보인다. 좀 더 명확히 해보자.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에게 대학의 가치는 무엇인가?” 이 문장에서 키워드는 “오늘날”“한국사회”“개인”“대학”“가치”, 이 다섯 개가 될 테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더 똑바로 하기 위해 주의사항 두 개를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첫째, 과거 한국에 존재했던 “대학”의 역사적 형태들을 특권화․이상화하지 않을 것. 둘째, “가치”의 기준을 하나로 환원하지 않을 것.
과거 대학의 역사적 형태들을 특권화․이상화시키는 않는 것이 첫 번째로 중요한 주의사항인 이유가 있다. 대학교육의 문제점을 논한 글들의 상당수가 과거의 대학교육을 받은 세대, 특히 교수인 경우가 많고 거의 예외없이 신자유주의에 점령당한 한국의 대학교육을 개탄하고 있다. 그것 자체는 좋지만 그러다보니 은연중에 마치 옛날의 대학교육이 지금의 그것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주장이 되는 경향이 있다. 사회적 위상이 높은 것과 교육의 질이 높은 것은 엄연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대학교육 문제처럼 역사화(historicization)와 현재화(contemporization)가 동시에 필요한 경우, 이런 태도는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많다. 특히 과거의 대학교육을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에게 이러한 태도는 속된 말로 ‘꼰대들의 불평’으로 들릴 수밖에 없으므로 설득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소통부터 어려워지고 만다.
두 번째 주의사항인 가치 기준을 하나로 환원하지 않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어떤 기준과 관점으로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대학의 가치는 천차만별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순전히 기업의 입장에서 오늘날 한국의 대학교육을 평가하면 기업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는 혹평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러나 고등교육의 대중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대학입학의 확대는 시민들의 교육수준 향상과 직결되므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대학교육은 단순히 시장적 가치로만 평가할 수 없는 한 사회의 총체적인 시스템이기 때문에 획일적인 잣대, 예를 들어 시장적 가치로만 평가하고 서열화하는 것은 일견 명쾌하고 심지어 ‘과학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은 가장 위험한 태도다.
대학은 어떻게 변했나
우선 대학의 위상 변화에서 논의를 시작하는 게 좋겠다. ‘위상’이라는 말은 대개 사회의 지배적 이념과 주류적 정서를 기준으로 평가된 것이다. 반면 ‘가치’는 좀 더 다양한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으로, ‘위상’보다는 좀 더 포괄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위상이 낮아진다고 해서 꼭 가치가 낮아졌다고 볼 수는 없다. 구체적 논의를 위해 먼저 대학교육의 위상 변화를 역사적으로 훑어보고, 대학교육을 둘러싼 담론들의 왜곡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 바탕 위에서 지금의 대학교육에 어떤 가치를, 어떤 관점에서 부여해야 하는지를 논해야 할 것이다.
1. 사회적 측면: 우월성에서 정상성으로
트로우(M. Trow)는 엘리트교육과 대중교육을 구분하는 기준을 취학률에 두었다. 일정 비율 이상이 취학하면 엘리트교육기관에서 대중교육기관화 되었다고, 혹은 되고 있는 중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사회마다 그 비율은 다를 수 있지만 트로우는 대략 15%를 기준으로 둔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에서 상급교육기관으로 진학하는 비율이 15%를 넘으면 그 상급교육은 더 이상 엘리트교육이라 말하기 어렵다. 한국에서 대학진학율이 15%를 넘은 시점은 1980년이다. 즉 그 시점부터 대학은 대중화 단계에 들어섰다. 그리고 50%를 넘은 시점부터는 보편화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대학교육이 보편화 단계에 들어선 시기는 1995년(55.1% *교육인적자원부, <우리나라 고등교육 현황 및 주요국의 발전사례 2002>)이다.
2000년을 기점으로 대학진학률은 80%를 넘기게 되는데, 이 정도 수치라면 대학교육이 사실상 ‘보통교육’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대학생집단을 사회의 엘리트 후보군 내지 지식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사라졌다. 1980년대 이전까지는 대학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선택된 사람’이었다. 집안의 자식들을 전부 대학에 입학시키려는 부모는 드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최소한 장남만큼은 대학에 입학시키려는 부모들이 많았다. 극심한 국가적 빈곤 속에서 초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부모세대의 ‘가방끈 컴플렉스’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육과정의 마지막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자식의 대학입학-손꼽히는 명문대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은 단순히 적성과 필요에 따른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결코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아주 ‘특별하고’ ‘무거운’ 사건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가족 전체가 총력을 기울여 대비해야하는 가족사적 이벤트였다. 단 한 단어로 표현해야한다면, 대학입학은 ‘우월성’의 증명이었다. 그것은 아무나 받을 수 없는 고등교육의 장에 마침내 진입한 ‘선택된 자’의 자랑스런 존재증명이었고, 동시에 온갖 고생을 무릅쓰며 자식을 최고교육기관에 입학시킨 부모의 의지와 노력에 대한 명예로운 훈장이었다. 물론 그 우월성은 서울대를 정점으로 철저하게 서열화한 ‘상대적 우월성’이었다.
사회가 바라보는 대학생의 위상도 지금과는 현저히 달랐다. 대학생은 졸업 후에 나라와 기업을 운영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할 일종의 엘리트 예비집단으로 취급되었다. 또한 사회의 공적 문제에 대해 비판하고 개입하는 지식인이기도 했다.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처지와 무관한 공적 이슈에 대해 지사적 열정으로 발언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도 했는데, 그들의 개입은 그들이 이해당사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순수성을 덜 의심받았고 더 호소력을 지닐 수 있었다. 전태일 열사가 일기에 적었던 “대학생 친구”라는 단어는 당시 대학생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던 어떤 심상을 압축적으로, 그리고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과거 사회가 대학생에게 부여했던 우월성은 그들이 단순히 소수의 선택받은 엘리트 예비집단 이어서라기보다는 고등교육을 통해 축적한 지식과 능력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활용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한 반대급부의 성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오늘날 대학교육을 이수하는 것은 ‘우월성의 지표’가 아니라 평균성, 정상성의 지표라는 사실이다. 대학에 가지 않는 쪽이 훨씬 소수다.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균적 사회구성원으로 인준받기 위해 대학에 간다. 물론 대학에 가지 않는, 혹은 가지 못하는 소수가 비정상으로 취급받는 현실은 분명 잘못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차별을 시정하는 것과 대다수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한다는 사실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인식하는 것, 이 두 개의 명제는 전혀 모순이거나 이율배반이 아니다. 얼마든지 동시에 추구될 수 있는 목표인 것이다. 중요한 건 지금의 대학교육에 어떤 가치를, 어떤 관점에서 부여할 것인가이다.
2. 문화적 측면: 중심에서 변방으로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시기는 물론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대학에는 명백히 다른 ‘두 문화(biculture)’가 공존하고 있었다. ‘운동권 문화’와 ‘비운동권 문화’ 말이다. ‘비운동권 문화’는 주류 대중문화와 통기타와 청바지로 흔히 표현되곤 하는 낭만주의적 청년문화를 말한다. 과거에도 주류 대중문화의 위력은 대단했고, 그런 대중문화가 가장 먼저 소비되는 공간 중 하나가 대학이라는 점 역시 변함이 없다. 즉, 일종의 ‘상수’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과거 대학가요제의 인기에서 알 수 있듯 대학생들이라는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운 낭민주의적이고 체제순응적인 청년문화가 대중문화의 주류가 되는 현상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점이겠다.
‘운동권 문화’는 소위 사회주의 미학과 한국의 전통적․민족주의적 문화가 결합된 학생운동진영 고유의 문화예술양식을 말한다. 특히 자주계열의 영향으로 북조선의 문화적 색채까지 더해지는 바람에 한국 학생운동의 문화는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독특하며 혼종적인 대학문화가 됐던 것이다. 운동권 문화는 199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완전히 쇠락하게 되지만, 꽤 오랫동안 대학문화의 핵심적 자리에 군림했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정치사회적으로 학생운동이 최절정에 이르렀던 시대적 환경 때문이지만, 운동문화가 하나의 ‘거대한 문화생태계’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문화생태계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감수성이 존재해야 하고, 창작-전파-향유의 매체가 존재해야 하며, 창작의 동기부여와 창작자의 재생산 역시 활발해야 한다. 그리고 이 요소들이 하나의 순환과정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 비로소 하나의 문화생태계가 유기적으로 살아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운동권 문화가 완전히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순환체계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지구라는 생태계가 태양이라는 외부의 ‘타자(他者)’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운동권 문화는 비운동권 문화, 즉 주류 대중문화와 낭민주의적 청년문화가 이미 대학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에 존재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었다. 기존의 청년문화를 비판하고, 그것과 갈등하고 때로는 그 장점을 흡수하는 등의 상호작용을 했기 때문에 운동권 문화는 더욱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학생운동이 빠른 속도로 몰락하고, 불안정노동의 전면화 로 졸업 후 안정된 일자리(decent job)를 잡을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자 대학문화 역시 급격히 폐색하기 시작했다. 운동권 문화도, 낭만주의적 청년문화도 모두 대학에서 사라졌다. 20대의 구매력이 약해지면서 대학생은 주류 대중문화의 타겟팅 집단에서도 10대, 30대, 40대 등 다른 세대보다 후순위로 밀려나게 된다. 창작활동은 물론 문화담론의 생산력도 과거에 비해 훨씬 약화됐다. 대학생의 숫자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대학공간 자체는 문화의 변방이 되고 만 것이다.
3. 정치․경제적 측면: 저항에서 적응으로
학생운동이 신화화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과거의 대학생운동과 오늘의 그것은 가장 크게 대별되는 요소 중 하나다. 1980년대 이전의 한국 대학생들은 정치적 격변마다 중요한, 때로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반 국민들에게 대학생은 단지 예비사회인이 아니라 예비지도층이었기 때문에, 일상에서의 일탈에도 대체로 관대한 편이었고, 대학생 스스로도 지식인이자 엘리트로서의 자기강박이 강했다. 지식인으로서의 자기강박은 한 마디로 국가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 또는 콤플렉스에 기인한 것이었다. 분단국, 그것도 친일파의 주도로 건국된 대한민국은 단지 자랑스런 모국만은 아니었다. 또한 엘리트로서의 자기강박은 근대화에 대한 사명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오랜 식민통치와 참혹한 전쟁 경험, 그리고 아프리카 최빈국 수준의 빈곤은 근대화를 필사의 과제로 만들었다.
엘리트이자 지식인이라는 정체성은 대학생 스스로에게 어떤 모순을 필연적으로 부과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발전에 헌신해야 하지만 동시에 국가의 부정의에 저항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부독재가 장기화하면서 대학은 점차 전투적 체제저항의 산실로 변해갔고, 민주주의의 쟁취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이뤄 내야할 시대정신이 됐다. 다른 국가의 경우, 학생운동보다 노동계급의 운동이 훨씬 더 격렬한 양상을 띠는 경우가 많았으나 한국의 경우 유례없는 좌익탄압과 레드 콤플렉스 때문에 온건한 노동조합운동마저 제대로 뿌리내리기 힘든 실정이었다. 사회운동을 대학생들이 주도하는 경향은 상당 기간 한국학생운동의 전통이 됐다. 그리고 이들 중 정치사회문화 등 각계에 진출한 사람들이 세력화하면서 이른바 민주화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대학의 수와 규모가 커지면서 대학생들의 숫자도 많아졌다. 베이비붐 세대라 불렸고 훗날 ‘386’세대라 불렸던 대학생들은 1980년대가 막 시작하자마자 평생 잊지 못할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바로 광주항쟁이었다. 군사정권이 미국의 묵인 하에 시민을 무차별 학살한 이 사건은 한국사의 전기이기도 했지만, 학생운동의 전기이기도 했다. 대학은 군사정권과 싸우기 위해 작은 군대가 되어야 했다. 전대협이라는 강력한 전국대학생조직이 만들어졌고 캠퍼스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정치공동체이자 생활공동체가 됐다.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며 학생운동은 전성기를 맞게 되고 이후 문민정부 출범까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다가 1996년 연세대학교 범민족대회가 파국으로 끝나며 쇠락하게 된다. 당시 연세대 사태는 유례없는 폭력진압과 캠퍼스 봉쇄로 이어지고, 결국 오랜 대치 끝에 사상최대의 검거자 숫자를 기록하며 당시 전국학생운동조직이던 한총련은 회복하기 힘든 치명타를 입게 된다. 이후 학생운동조직은 빠른 속도로 해체되었고, 경제위기까지 겹쳐 대학은 점차 과거의 정치성을 잃고 ‘취업공동체’화하기 시작한다.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해방 이후 한국 대학교육의 성과는 그야말로 눈부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존자원이 없는데다 오랜 식민지 수탈과 연이은 내전으로 완전히 피폐해진 국가에서 소위 ‘인적자원’의 가치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다. 식민지 시기 동경제국대학의 모델을 본떠 만든 경성제국대학은 해방 이후 국가적 필요에 의해 비대해졌고, 농지개혁 당시 지주세력이 자신의 농지를 싸게 매입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수의 사립대학을 설립하면서 고등교육기관의 전체 규모는 급속히 팽창했다. 축적해놓은 부가 없는 국민 개인의 차원에서 대학은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이자 신분상승의 동아줄이나 다름없었다. 경제발전이 가속화하면서 일자리의 양 뿐 아니라 질도 동시에 높아지고 있었고, 대학졸업장만 있으면 그야말로 사회적으로 최상위에 있는 직업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은 시장경제를 포방하고 있었지만, 독재정권에 의해 사실상의 계획경제가 운용됐던 국가였기 때문에, 경제발전은 선택과 집중 전략에 따라 정부의 차관이 특정 산업 혹은 재벌에게 집중 투입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학연 지연을 통해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가 발생했지만, 기업은 높은 교육수준의 인력을 싼값에 활용할 수 있었으므로 세계 제조업 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한국 자본주의는 이제 동아시아 경제기적의 가장 상징적인 사례로 꼽히는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 대학교육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국가적 필요에 의해 대학의 교과과정이 좌지우지된 탓에 체계적인 학문의 발달은 요원했다. 자연과학의 경우 기초학문보다는 당장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응용학문에 집중투자했고, 인문학은 자생성을 기르기보다 외국 유행담론의 중개상 역할을 하기 바빴다.
대학의 이런 명암은 고스란히 한국사회의 명암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도국을 벗어나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려하는 순간, 한국 대학교육의 한계는 여실히 증명되었다. 일정 수준을 넘어서자 더 이상 경쟁력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IMD(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의 세계 경쟁력 평가’를 보면 2009년 한국의 국가경쟁력은 27위인데 반해 대학경쟁력(사회부합도)은 57개국 중 51위로 최하위권이었다. 또 OECD 교육지표를 보면 한국의 대학등록금은 미국 다음으로 비싸 세계2위이고, 특히 민간 부담비율이 1.9%에 달해 OECD 평균의 4배에 달하는 압도적 1위였다. 민간부담비율이 높다는 건 국가가 대학교육에 투자하지 않고 그 부담이 모두 학생과 학부모에게 전가되고 있다는 걸 시사한다. 게다가 세계적으로도 유례없이 비정규직이 확산되면서 대학을 졸업해도 정규직 임금의 절반 수준인 계약직 노동자가 되거나 인턴사원으로 입사해 아르바이트비 정도의 돈만 받고 일하다가 계약해지 당하기 일쑤다. 대학을 졸업해도 웬만한 ‘스펙’을 쌓지 않으면 취업 자체가 어려워 지다보니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졸업을 유예하는 일이 일상적 풍경이 되었다.
능력주의, 학력주의, 학벌주의
근대적 공교육의 맹아는 영국의 퍼블릭 스쿨이었다. 이름은 ‘퍼블릭(공공의) 스쿨’이지만, 올바른 번역어는 ‘사립학교’다. 1442년 헨리 5세가 설립한 이튼 칼리지가 대표적인데, 헨리 5세는 “1년 수입이 5마르크 이상인 사람은 입학자격이 없다”고 선언했다. 빈곤층에 무상교육을 하기 위한 학교였던 셈이다. 하지만 왕의 이런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튼칼리지는 금세 귀족형 사립학교로 변질되고 말았다. 학교당국과 귀족들은 빈곤층 자녀들을 퇴학시키기 위해 온갖 치사한 방법들을 다 고안해내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점심시간에 출석을 부르는 것이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지 않는 빈곤층 자녀들이 점심을 먹으러 집에 다녀오는 틈을 타 잽싸게 출석을 부르고, 결석으로 처리해 버렸던 것이다. 물론 일정 횟수 이상 결석한 학생들은 즉시 퇴학 처리되었다. 학교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교장들과 귀족들의 선민주의가 결합한 결과, 최초의 공공교육기관은 이렇게 출발부터 기형적인 형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교육기관의 높은 진입장벽을 없애야한다는 지상명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강력해지고 명백해졌다. 그 명제가 강화되는 과정은 서구의 근대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봉건제가 허물어지고 각국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발발한다. “만인은 평등하다”는 선언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선언은 그 자체로 고귀했다. 하지만 노동계급은 애초에 배제된 반쪽짜리 선언이었다. 부르주아계급은 단지 귀족들과 교회의 기득권을 빼앗기 위한 강력한 명분,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적 무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어쨌든 부르주아는 새롭게 부상한 개혁세력이자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총아였다. 그들의 전략은 성공했다. 낡은 제도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부르주아의, 부르주아를 위한, 부르주아에 의한 제도들이 속속 탄생했다. 맑스가 지적한 것처럼,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역사는 눈부시게 진보했다. 부르주아들은 왕족과 귀족들의 허세와 무위도식에 넌더리를 내 온지 오래였다. 또한 성직자-지식인의 고담준론과 위선을 경멸했고 ,장인들의 비효율과 폐쇄성을 증오했다. 부르주아들은 모든 미신과 인습을 발가벗겨 백일하에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발가벗겨졌다. 자신이 노동계급을 착취한다는 사실만 빼고 말이다.
이런 부르주아에 의해 학력주의가 차츰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흔히 학력주의를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인 차별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학력주의는 근대 부르주아 혁명의 산물이다. 신분에 의한 차별을 부르주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무능한 귀족들보다 자신들이 훨씬 능력이 뛰어나다고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차별을 반대한 게 아니라 신분에 의한 차별만을 반대했다. 대신에 능력에 의한 차별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러나 그 능력이라는 것을 누가 판단해주는가. 부르주아는 확고한 답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시장합리성’이다. 시장에서 승리하면 유능하며, 시장에서 패배하면 무능하다. ‘시장’이란, 백 퍼센트의 확률로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이름난 장인이 몇 년에 걸쳐 혼신을 다해 만들어낸 제품도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다면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다. 반면 아무리 허술하고 천박한 제품도 시장에서 팔리면 훌륭한 제품이다. “만인이 평등하다”는 부르주아의 인권선언은 사실 제대로 풀어쓰면 "시장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인 것이다. 문제는, 매 순간마다 시장의 판단을 물어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뭔가 간소한 검증도구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학력이었다. 그리하여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가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계급의 ‘구별짓기’ 전략이 됐다. “질 좋은 교육”을 받고 “교양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 다시 말해 귀족취향에 대한 선망을 만족시켜주면서도 가난한 노동계급을 가급적 배제할 수 있는 편리한 도구가 바로 학력주의였다. 비유하자면 능력주의는 학력주의의 ‘정신’이고 학력주의는 능력주의의 ‘육체’이다. 능력주의와 학력주의는 이렇게 시장합리성을 은유하는 이데올로기들로서 근대 이후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을 형성하게 되었다.
반면 학벌주의는 능력주의/학력주의와 다른 이데올로기이다. 능력주의/학력주의는 개념상 상위에 있는 시장합리성에 복종할 수밖에 없지만, 학벌주의는 시장합리성마저 무위에 돌리는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학벌주의의 경우, 고교 졸업 이후 처음 들어가는 대학의 이름과 레벨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 그리고 이 등급은 평생을 쫒아 다니는 신분, 일종의 카스트가 된다. 한번 서울대는 영원한 서울대, 한번 지잡대면 영원한 지잡대다(지잡대: ‘지방의 고만고만한 대학’을 의미하는 비하어). 시장에서 승리해 유능함을 증명한 기업인조차도 중졸 또는 고졸인 학력을 숨기거나 ‘세탁’하는 게 바로 한국적 학벌주의의 현실인 것이다. 그 뿐인가. 청소년들이 입시스트레스로 목숨을 끊는 참극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고질적인 한국 교육문제를 논할 때, 대학서열화와 학벌주의는 모든 해악의 근원으로 지목되어 비난이 집중되곤 했다. 공교육의 목적이 국립서울대학교로 상징되는 대입시험 하나로 수렴되어버리는 현상이 무려 수 십 년간 지속되어왔기에 학벌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지금의 현실이다. 2010년 현재, 학벌주의에 반대하는 기존의 관점과 논리로는 결코 학벌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는 점이다.
대학은 공공성이다
학벌주의에 반대하는 논리가 공유하고 있는 관점은, 학벌주의가 능력에 따른 정당한 평가가 아니라 신분제적 성격의 부당한 평가라는 점이다. 즉, 학벌주의의 대당에 내세운 논리는 바로 능력주의다. 앞서 살펴본 대로 능력주의는 근대적 이데올로기이며 신분제적 차별에 반대해 시장합리성을 내세웠던 부르주아 계급의 논리였다. 하지만 능력에 따른 차별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능력주의를 일관되게 고수할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까. 결국 그것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와 약탈적 축재를 통해 이미 부를 축적한 ‘시장경제의 능력자’들의 정당성을 승인해줄 뿐이다. 이른바 ‘시원적 축적’이 이미 끝난 상황에서 한국의 부자들은 이미 2세대 이후로 넘어왔다. 그리고 이들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부를 통해 지식, 교양, 학력까지 쌓아올렸다. 이들의 학력은 이미 국내를 넘어섰다. 더 이상 서울대 입학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가 끝났다’라는 말은 결국 ‘부’의 격차가 ‘능력’의 격차로 표현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대학이 엘리트교육기관의 역할을 하던 시절, 자식을 대학에 입학시키는 것은 수익성이 꽤 높은 투자행위였다. 어쨌든 출발점이 지금보다는 평등했기 때문에 능력주의라는 관점은 사회적으로도 정당화되기 쉬웠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절은 완벽히 끝나버렸다. 지금처럼 부의 격차가 극심한 반면 대학교육은 보편화된 상황에서 능력주의의 관점으로 대학교육을 바라볼 경우,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대학서열’이 ‘아이비리그를 정점으로 한 서열’로 무늬만 바뀔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먹고살기 힘든 서민들이 끝없는 학력 인플레이션의 계단을 따라 아이비리그까지 쫒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가능하다해도 지속되지 못한다. 능력을 재는 기준 자체가 무한히 학력으로 환원되어버리는 사회에서, 능력주의는 답이 될 수 없다. 답은 사실 우리의 현실 속에 이미 나와 있다. 대학진학률이 80%가 넘는 현실 말이다.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있다면 대학교육을 신분상승의 도구로 바라보던 시각을 과감히 내던지고 공공성과 보편성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학력인플레 또는 학력과잉 담론도 이런 관점에서보면 다소 과장된 측면이 적지 않다. 어떤 이들은 노골적으로 “요즘은 개나 소나 대학에 간다”고 이죽거린다. 그러면서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되는, 혹은 가지 말아야할 아이들이 괜히 대학에 가서 부모 등골만 빼먹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런 비난은 정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비겁하기까지 하다. 현실적으로 대학 졸업장이 없이는 취직 뿐 아니라 사회의 평균인 취급도 받기 힘든 상황에서 대학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이미 여러 통계들이 밝혀주고 있듯이 고졸자와 대졸자의 임금격차는 1990년대 이후 급격히 벌어져서 같은 일을 하더라도 임금이 1.5배 이상 차이가 난다. 초등학교 때부터 어린이들에게 대학을 그렇게 강조해놓고 이제 와서 “대학생들이 너무 많다”는 식으로 힐난하는 것은 그야말로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학력인플레 담론은 이를테면 일자리의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 때문에 확산된 담론인데, 세계 어떤 곳도 교육의 목적을 취업이라 명시한 나라는 없다. 교육의 목표는 어떤 사회가 각기 지향하는 공적 가치에 놓이는 게 당연한 것이다. 또한 국가는 최대다수의 주권자에게 최대한 질 높은 교육을 제공하는 걸 교육의 목표로 삼는다. 대학진학률이 높아졌다는 것은 어떤 사회의 고등교육 기회가 확대된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환영해야하는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엄청나게 잘못된 일인 것처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은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오히려 비난을 받아야하는 것은 한국의 기업집단들이다. 노동자의 교육비용을 공교육에 전가해 결과적으로 선진국 기업 같으면 자신들이 투자해야 할 비용을 국민전체에 부담시키면서도, 대학교육의 질이 떨어지네 어쩌네 불만만 쏟아놓기 바쁘니 말이다.
오늘날의 대학생들에게 과거와 같은 위상은 부여되지 않는다. 대학생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소수의 우월한 집단이라는 식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유는 단순하다. 대학생들이 과거에 비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과거에 비해 지나치게 많아졌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한 걸까? 그렇다고 하긴 어렵다. 오히려 고등교육의 보편화라는 측면에서는 역사적 진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과거 대학생들에게 사회가 부여한 위상이 과연 적절한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모델이 지속가능한지도 의문이다. 엘리트교육과 대중교육의 비율이나 관계는 해묵은 논쟁거리이긴 하지만, 소위 선진국들이 예외 없이 엘리트교육의 보편화를 경험했으며 사회적 논쟁과 합의를 통해 대응해온 나라들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어쨌든 대학진학률이 80%가 넘는 현재 시점에서 한국사회가 과거의 대학교육 형태로 회귀할 수는 없다. 이미 비가역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 변화가 더 나쁜 형태로, 예컨대 극단적 형태의 사유화와 민영화의 형태로 변질되어 그 부담이 다수 대학생과 학부모에게 일방적으로 전가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학의 공공성 테제를 사회적으로 합의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출처: https://xenga.tistory.com/202 [Niemandsnacht]
한국인에게 대학이란 무엇인가
대학의 사회적 위상과 가치의 변동
한국의 대학진학률은 80%를 넘는다. 지난 20년 사이 두 배로 늘어났다. 단순한 사실이지만 그 함의는 결코 적지 않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지나치게 추상적인 질문처럼 보인다. 좀 더 명확히 해보자.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에게 대학의 가치는 무엇인가?” 이 문장에서 키워드는 “오늘날”“한국사회”“개인”“대학”“가치”, 이 다섯 개가 될 테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더 똑바로 하기 위해 주의사항 두 개를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 첫째, 과거 한국에 존재했던 “대학”의 역사적 형태들을 특권화․이상화하지 않을 것. 둘째, “가치”의 기준을 하나로 환원하지 않을 것.
과거 대학의 역사적 형태들을 특권화․이상화시키는 않는 것이 첫 번째로 중요한 주의사항인 이유가 있다. 대학교육의 문제점을 논한 글들의 상당수가 과거의 대학교육을 받은 세대, 특히 교수인 경우가 많고 거의 예외없이 신자유주의에 점령당한 한국의 대학교육을 개탄하고 있다. 그것 자체는 좋지만 그러다보니 은연중에 마치 옛날의 대학교육이 지금의 그것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주장이 되는 경향이 있다. 사회적 위상이 높은 것과 교육의 질이 높은 것은 엄연히 다른 차원의 문제다. 대학교육 문제처럼 역사화(historicization)와 현재화(contemporization)가 동시에 필요한 경우, 이런 태도는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많다. 특히 과거의 대학교육을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에게 이러한 태도는 속된 말로 ‘꼰대들의 불평’으로 들릴 수밖에 없으므로 설득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소통부터 어려워지고 만다.
두 번째 주의사항인 가치 기준을 하나로 환원하지 않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어떤 기준과 관점으로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대학의 가치는 천차만별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순전히 기업의 입장에서 오늘날 한국의 대학교육을 평가하면 기업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는 혹평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러나 고등교육의 대중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대학입학의 확대는 시민들의 교육수준 향상과 직결되므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대학교육은 단순히 시장적 가치로만 평가할 수 없는 한 사회의 총체적인 시스템이기 때문에 획일적인 잣대, 예를 들어 시장적 가치로만 평가하고 서열화하는 것은 일견 명쾌하고 심지어 ‘과학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은 가장 위험한 태도다.
대학은 어떻게 변했나
우선 대학의 위상 변화에서 논의를 시작하는 게 좋겠다. ‘위상’이라는 말은 대개 사회의 지배적 이념과 주류적 정서를 기준으로 평가된 것이다. 반면 ‘가치’는 좀 더 다양한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으로, ‘위상’보다는 좀 더 포괄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위상이 낮아진다고 해서 꼭 가치가 낮아졌다고 볼 수는 없다. 구체적 논의를 위해 먼저 대학교육의 위상 변화를 역사적으로 훑어보고, 대학교육을 둘러싼 담론들의 왜곡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 바탕 위에서 지금의 대학교육에 어떤 가치를, 어떤 관점에서 부여해야 하는지를 논해야 할 것이다.
1. 사회적 측면: 우월성에서 정상성으로
트로우(M. Trow)는 엘리트교육과 대중교육을 구분하는 기준을 취학률에 두었다. 일정 비율 이상이 취학하면 엘리트교육기관에서 대중교육기관화 되었다고, 혹은 되고 있는 중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사회마다 그 비율은 다를 수 있지만 트로우는 대략 15%를 기준으로 둔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에서 상급교육기관으로 진학하는 비율이 15%를 넘으면 그 상급교육은 더 이상 엘리트교육이라 말하기 어렵다. 한국에서 대학진학율이 15%를 넘은 시점은 1980년이다. 즉 그 시점부터 대학은 대중화 단계에 들어섰다. 그리고 50%를 넘은 시점부터는 보편화 단계라고 말할 수 있다. 한국의 대학교육이 보편화 단계에 들어선 시기는 1995년(55.1% *교육인적자원부, <우리나라 고등교육 현황 및 주요국의 발전사례 2002>)이다.
2000년을 기점으로 대학진학률은 80%를 넘기게 되는데, 이 정도 수치라면 대학교육이 사실상 ‘보통교육’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대학생집단을 사회의 엘리트 후보군 내지 지식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사라졌다. 1980년대 이전까지는 대학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선택된 사람’이었다. 집안의 자식들을 전부 대학에 입학시키려는 부모는 드물었다. 그러나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최소한 장남만큼은 대학에 입학시키려는 부모들이 많았다. 극심한 국가적 빈곤 속에서 초등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부모세대의 ‘가방끈 컴플렉스’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교육과정의 마지막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자식의 대학입학-손꼽히는 명문대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은 단순히 적성과 필요에 따른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결코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아주 ‘특별하고’ ‘무거운’ 사건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가족 전체가 총력을 기울여 대비해야하는 가족사적 이벤트였다. 단 한 단어로 표현해야한다면, 대학입학은 ‘우월성’의 증명이었다. 그것은 아무나 받을 수 없는 고등교육의 장에 마침내 진입한 ‘선택된 자’의 자랑스런 존재증명이었고, 동시에 온갖 고생을 무릅쓰며 자식을 최고교육기관에 입학시킨 부모의 의지와 노력에 대한 명예로운 훈장이었다. 물론 그 우월성은 서울대를 정점으로 철저하게 서열화한 ‘상대적 우월성’이었다.
사회가 바라보는 대학생의 위상도 지금과는 현저히 달랐다. 대학생은 졸업 후에 나라와 기업을 운영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할 일종의 엘리트 예비집단으로 취급되었다. 또한 사회의 공적 문제에 대해 비판하고 개입하는 지식인이기도 했다.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처지와 무관한 공적 이슈에 대해 지사적 열정으로 발언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기도 했는데, 그들의 개입은 그들이 이해당사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순수성을 덜 의심받았고 더 호소력을 지닐 수 있었다. 전태일 열사가 일기에 적었던 “대학생 친구”라는 단어는 당시 대학생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던 어떤 심상을 압축적으로, 그리고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과거 사회가 대학생에게 부여했던 우월성은 그들이 단순히 소수의 선택받은 엘리트 예비집단 이어서라기보다는 고등교육을 통해 축적한 지식과 능력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활용해야 한다는 당위에 대한 반대급부의 성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오늘날 대학교육을 이수하는 것은 ‘우월성의 지표’가 아니라 평균성, 정상성의 지표라는 사실이다. 대학에 가지 않는 쪽이 훨씬 소수다.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균적 사회구성원으로 인준받기 위해 대학에 간다. 물론 대학에 가지 않는, 혹은 가지 못하는 소수가 비정상으로 취급받는 현실은 분명 잘못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차별을 시정하는 것과 대다수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한다는 사실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인식하는 것, 이 두 개의 명제는 전혀 모순이거나 이율배반이 아니다. 얼마든지 동시에 추구될 수 있는 목표인 것이다. 중요한 건 지금의 대학교육에 어떤 가치를, 어떤 관점에서 부여할 것인가이다.
2. 문화적 측면: 중심에서 변방으로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시기는 물론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대학에는 명백히 다른 ‘두 문화(biculture)’가 공존하고 있었다. ‘운동권 문화’와 ‘비운동권 문화’ 말이다. ‘비운동권 문화’는 주류 대중문화와 통기타와 청바지로 흔히 표현되곤 하는 낭만주의적 청년문화를 말한다. 과거에도 주류 대중문화의 위력은 대단했고, 그런 대중문화가 가장 먼저 소비되는 공간 중 하나가 대학이라는 점 역시 변함이 없다. 즉, 일종의 ‘상수’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과거 대학가요제의 인기에서 알 수 있듯 대학생들이라는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운 낭민주의적이고 체제순응적인 청년문화가 대중문화의 주류가 되는 현상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점이겠다.
‘운동권 문화’는 소위 사회주의 미학과 한국의 전통적․민족주의적 문화가 결합된 학생운동진영 고유의 문화예술양식을 말한다. 특히 자주계열의 영향으로 북조선의 문화적 색채까지 더해지는 바람에 한국 학생운동의 문화는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독특하며 혼종적인 대학문화가 됐던 것이다. 운동권 문화는 199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완전히 쇠락하게 되지만, 꽤 오랫동안 대학문화의 핵심적 자리에 군림했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정치사회적으로 학생운동이 최절정에 이르렀던 시대적 환경 때문이지만, 운동문화가 하나의 ‘거대한 문화생태계’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문화생태계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감수성이 존재해야 하고, 창작-전파-향유의 매체가 존재해야 하며, 창작의 동기부여와 창작자의 재생산 역시 활발해야 한다. 그리고 이 요소들이 하나의 순환과정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면 비로소 하나의 문화생태계가 유기적으로 살아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운동권 문화가 완전히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순환체계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지구라는 생태계가 태양이라는 외부의 ‘타자(他者)’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운동권 문화는 비운동권 문화, 즉 주류 대중문화와 낭민주의적 청년문화가 이미 대학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에 존재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었다. 기존의 청년문화를 비판하고, 그것과 갈등하고 때로는 그 장점을 흡수하는 등의 상호작용을 했기 때문에 운동권 문화는 더욱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학생운동이 빠른 속도로 몰락하고, 불안정노동의 전면화 로 졸업 후 안정된 일자리(decent job)를 잡을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지자 대학문화 역시 급격히 폐색하기 시작했다. 운동권 문화도, 낭만주의적 청년문화도 모두 대학에서 사라졌다. 20대의 구매력이 약해지면서 대학생은 주류 대중문화의 타겟팅 집단에서도 10대, 30대, 40대 등 다른 세대보다 후순위로 밀려나게 된다. 창작활동은 물론 문화담론의 생산력도 과거에 비해 훨씬 약화됐다. 대학생의 숫자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대학공간 자체는 문화의 변방이 되고 만 것이다.
3. 정치․경제적 측면: 저항에서 적응으로
학생운동이 신화화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과거의 대학생운동과 오늘의 그것은 가장 크게 대별되는 요소 중 하나다. 1980년대 이전의 한국 대학생들은 정치적 격변마다 중요한, 때로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반 국민들에게 대학생은 단지 예비사회인이 아니라 예비지도층이었기 때문에, 일상에서의 일탈에도 대체로 관대한 편이었고, 대학생 스스로도 지식인이자 엘리트로서의 자기강박이 강했다. 지식인으로서의 자기강박은 한 마디로 국가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 또는 콤플렉스에 기인한 것이었다. 분단국, 그것도 친일파의 주도로 건국된 대한민국은 단지 자랑스런 모국만은 아니었다. 또한 엘리트로서의 자기강박은 근대화에 대한 사명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오랜 식민통치와 참혹한 전쟁 경험, 그리고 아프리카 최빈국 수준의 빈곤은 근대화를 필사의 과제로 만들었다.
엘리트이자 지식인이라는 정체성은 대학생 스스로에게 어떤 모순을 필연적으로 부과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발전에 헌신해야 하지만 동시에 국가의 부정의에 저항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부독재가 장기화하면서 대학은 점차 전투적 체제저항의 산실로 변해갔고, 민주주의의 쟁취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이뤄 내야할 시대정신이 됐다. 다른 국가의 경우, 학생운동보다 노동계급의 운동이 훨씬 더 격렬한 양상을 띠는 경우가 많았으나 한국의 경우 유례없는 좌익탄압과 레드 콤플렉스 때문에 온건한 노동조합운동마저 제대로 뿌리내리기 힘든 실정이었다. 사회운동을 대학생들이 주도하는 경향은 상당 기간 한국학생운동의 전통이 됐다. 그리고 이들 중 정치사회문화 등 각계에 진출한 사람들이 세력화하면서 이른바 민주화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대학의 수와 규모가 커지면서 대학생들의 숫자도 많아졌다. 베이비붐 세대라 불렸고 훗날 ‘386’세대라 불렸던 대학생들은 1980년대가 막 시작하자마자 평생 잊지 못할 트라우마를 겪게 된다. 바로 광주항쟁이었다. 군사정권이 미국의 묵인 하에 시민을 무차별 학살한 이 사건은 한국사의 전기이기도 했지만, 학생운동의 전기이기도 했다. 대학은 군사정권과 싸우기 위해 작은 군대가 되어야 했다. 전대협이라는 강력한 전국대학생조직이 만들어졌고 캠퍼스는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정치공동체이자 생활공동체가 됐다. 1987년 6월 항쟁을 거치며 학생운동은 전성기를 맞게 되고 이후 문민정부 출범까지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다가 1996년 연세대학교 범민족대회가 파국으로 끝나며 쇠락하게 된다. 당시 연세대 사태는 유례없는 폭력진압과 캠퍼스 봉쇄로 이어지고, 결국 오랜 대치 끝에 사상최대의 검거자 숫자를 기록하며 당시 전국학생운동조직이던 한총련은 회복하기 힘든 치명타를 입게 된다. 이후 학생운동조직은 빠른 속도로 해체되었고, 경제위기까지 겹쳐 대학은 점차 과거의 정치성을 잃고 ‘취업공동체’화하기 시작한다.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해방 이후 한국 대학교육의 성과는 그야말로 눈부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존자원이 없는데다 오랜 식민지 수탈과 연이은 내전으로 완전히 피폐해진 국가에서 소위 ‘인적자원’의 가치는 거의 절대적인 것이었다. 식민지 시기 동경제국대학의 모델을 본떠 만든 경성제국대학은 해방 이후 국가적 필요에 의해 비대해졌고, 농지개혁 당시 지주세력이 자신의 농지를 싸게 매입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많은 수의 사립대학을 설립하면서 고등교육기관의 전체 규모는 급속히 팽창했다. 축적해놓은 부가 없는 국민 개인의 차원에서 대학은 그야말로 선망의 대상이자 신분상승의 동아줄이나 다름없었다. 경제발전이 가속화하면서 일자리의 양 뿐 아니라 질도 동시에 높아지고 있었고, 대학졸업장만 있으면 그야말로 사회적으로 최상위에 있는 직업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은 시장경제를 포방하고 있었지만, 독재정권에 의해 사실상의 계획경제가 운용됐던 국가였기 때문에, 경제발전은 선택과 집중 전략에 따라 정부의 차관이 특정 산업 혹은 재벌에게 집중 투입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학연 지연을 통해 온갖 비리와 부정부패가 발생했지만, 기업은 높은 교육수준의 인력을 싼값에 활용할 수 있었으므로 세계 제조업 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한국 자본주의는 이제 동아시아 경제기적의 가장 상징적인 사례로 꼽히는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 대학교육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국가적 필요에 의해 대학의 교과과정이 좌지우지된 탓에 체계적인 학문의 발달은 요원했다. 자연과학의 경우 기초학문보다는 당장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응용학문에 집중투자했고, 인문학은 자생성을 기르기보다 외국 유행담론의 중개상 역할을 하기 바빴다.
대학의 이런 명암은 고스란히 한국사회의 명암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도국을 벗어나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려하는 순간, 한국 대학교육의 한계는 여실히 증명되었다. 일정 수준을 넘어서자 더 이상 경쟁력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IMD(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의 세계 경쟁력 평가’를 보면 2009년 한국의 국가경쟁력은 27위인데 반해 대학경쟁력(사회부합도)은 57개국 중 51위로 최하위권이었다. 또 OECD 교육지표를 보면 한국의 대학등록금은 미국 다음으로 비싸 세계2위이고, 특히 민간 부담비율이 1.9%에 달해 OECD 평균의 4배에 달하는 압도적 1위였다. 민간부담비율이 높다는 건 국가가 대학교육에 투자하지 않고 그 부담이 모두 학생과 학부모에게 전가되고 있다는 걸 시사한다. 게다가 세계적으로도 유례없이 비정규직이 확산되면서 대학을 졸업해도 정규직 임금의 절반 수준인 계약직 노동자가 되거나 인턴사원으로 입사해 아르바이트비 정도의 돈만 받고 일하다가 계약해지 당하기 일쑤다. 대학을 졸업해도 웬만한 ‘스펙’을 쌓지 않으면 취업 자체가 어려워 지다보니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졸업을 유예하는 일이 일상적 풍경이 되었다.
능력주의, 학력주의, 학벌주의
근대적 공교육의 맹아는 영국의 퍼블릭 스쿨이었다. 이름은 ‘퍼블릭(공공의) 스쿨’이지만, 올바른 번역어는 ‘사립학교’다. 1442년 헨리 5세가 설립한 이튼 칼리지가 대표적인데, 헨리 5세는 “1년 수입이 5마르크 이상인 사람은 입학자격이 없다”고 선언했다. 빈곤층에 무상교육을 하기 위한 학교였던 셈이다. 하지만 왕의 이런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튼칼리지는 금세 귀족형 사립학교로 변질되고 말았다. 학교당국과 귀족들은 빈곤층 자녀들을 퇴학시키기 위해 온갖 치사한 방법들을 다 고안해내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점심시간에 출석을 부르는 것이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지 않는 빈곤층 자녀들이 점심을 먹으러 집에 다녀오는 틈을 타 잽싸게 출석을 부르고, 결석으로 처리해 버렸던 것이다. 물론 일정 횟수 이상 결석한 학생들은 즉시 퇴학 처리되었다. 학교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교장들과 귀족들의 선민주의가 결합한 결과, 최초의 공공교육기관은 이렇게 출발부터 기형적인 형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교육기관의 높은 진입장벽을 없애야한다는 지상명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강력해지고 명백해졌다. 그 명제가 강화되는 과정은 서구의 근대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봉건제가 허물어지고 각국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발발한다. “만인은 평등하다”는 선언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 선언은 그 자체로 고귀했다. 하지만 노동계급은 애초에 배제된 반쪽짜리 선언이었다. 부르주아계급은 단지 귀족들과 교회의 기득권을 빼앗기 위한 강력한 명분,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적 무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어쨌든 부르주아는 새롭게 부상한 개혁세력이자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총아였다. 그들의 전략은 성공했다. 낡은 제도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부르주아의, 부르주아를 위한, 부르주아에 의한 제도들이 속속 탄생했다. 맑스가 지적한 것처럼,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역사는 눈부시게 진보했다. 부르주아들은 왕족과 귀족들의 허세와 무위도식에 넌더리를 내 온지 오래였다. 또한 성직자-지식인의 고담준론과 위선을 경멸했고 ,장인들의 비효율과 폐쇄성을 증오했다. 부르주아들은 모든 미신과 인습을 발가벗겨 백일하에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발가벗겨졌다. 자신이 노동계급을 착취한다는 사실만 빼고 말이다.
이런 부르주아에 의해 학력주의가 차츰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흔히 학력주의를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인 차별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학력주의는 근대 부르주아 혁명의 산물이다. 신분에 의한 차별을 부르주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무능한 귀족들보다 자신들이 훨씬 능력이 뛰어나다고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차별을 반대한 게 아니라 신분에 의한 차별만을 반대했다. 대신에 능력에 의한 차별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러나 그 능력이라는 것을 누가 판단해주는가. 부르주아는 확고한 답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시장합리성’이다. 시장에서 승리하면 유능하며, 시장에서 패배하면 무능하다. ‘시장’이란, 백 퍼센트의 확률로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이름난 장인이 몇 년에 걸쳐 혼신을 다해 만들어낸 제품도 시장에서 팔리지 않는다면 그저 쓰레기에 불과하다. 반면 아무리 허술하고 천박한 제품도 시장에서 팔리면 훌륭한 제품이다. “만인이 평등하다”는 부르주아의 인권선언은 사실 제대로 풀어쓰면 "시장 앞에서 만인이 평등하다"인 것이다. 문제는, 매 순간마다 시장의 판단을 물어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뭔가 간소한 검증도구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학력이었다. 그리하여 어떤 교육을 받았는가가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계급의 ‘구별짓기’ 전략이 됐다. “질 좋은 교육”을 받고 “교양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 다시 말해 귀족취향에 대한 선망을 만족시켜주면서도 가난한 노동계급을 가급적 배제할 수 있는 편리한 도구가 바로 학력주의였다. 비유하자면 능력주의는 학력주의의 ‘정신’이고 학력주의는 능력주의의 ‘육체’이다. 능력주의와 학력주의는 이렇게 시장합리성을 은유하는 이데올로기들로서 근대 이후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을 형성하게 되었다.
반면 학벌주의는 능력주의/학력주의와 다른 이데올로기이다. 능력주의/학력주의는 개념상 상위에 있는 시장합리성에 복종할 수밖에 없지만, 학벌주의는 시장합리성마저 무위에 돌리는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학벌주의의 경우, 고교 졸업 이후 처음 들어가는 대학의 이름과 레벨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 그리고 이 등급은 평생을 쫒아 다니는 신분, 일종의 카스트가 된다. 한번 서울대는 영원한 서울대, 한번 지잡대면 영원한 지잡대다(지잡대: ‘지방의 고만고만한 대학’을 의미하는 비하어). 시장에서 승리해 유능함을 증명한 기업인조차도 중졸 또는 고졸인 학력을 숨기거나 ‘세탁’하는 게 바로 한국적 학벌주의의 현실인 것이다. 그 뿐인가. 청소년들이 입시스트레스로 목숨을 끊는 참극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고질적인 한국 교육문제를 논할 때, 대학서열화와 학벌주의는 모든 해악의 근원으로 지목되어 비난이 집중되곤 했다. 공교육의 목적이 국립서울대학교로 상징되는 대입시험 하나로 수렴되어버리는 현상이 무려 수 십 년간 지속되어왔기에 학벌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지금의 현실이다. 2010년 현재, 학벌주의에 반대하는 기존의 관점과 논리로는 결코 학벌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는 점이다.
대학은 공공성이다
학벌주의에 반대하는 논리가 공유하고 있는 관점은, 학벌주의가 능력에 따른 정당한 평가가 아니라 신분제적 성격의 부당한 평가라는 점이다. 즉, 학벌주의의 대당에 내세운 논리는 바로 능력주의다. 앞서 살펴본 대로 능력주의는 근대적 이데올로기이며 신분제적 차별에 반대해 시장합리성을 내세웠던 부르주아 계급의 논리였다. 하지만 능력에 따른 차별을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능력주의를 일관되게 고수할 경우, 어떤 일이 발생할까. 결국 그것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와 약탈적 축재를 통해 이미 부를 축적한 ‘시장경제의 능력자’들의 정당성을 승인해줄 뿐이다. 이른바 ‘시원적 축적’이 이미 끝난 상황에서 한국의 부자들은 이미 2세대 이후로 넘어왔다. 그리고 이들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부를 통해 지식, 교양, 학력까지 쌓아올렸다. 이들의 학력은 이미 국내를 넘어섰다. 더 이상 서울대 입학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가 끝났다’라는 말은 결국 ‘부’의 격차가 ‘능력’의 격차로 표현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대학이 엘리트교육기관의 역할을 하던 시절, 자식을 대학에 입학시키는 것은 수익성이 꽤 높은 투자행위였다. 어쨌든 출발점이 지금보다는 평등했기 때문에 능력주의라는 관점은 사회적으로도 정당화되기 쉬웠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절은 완벽히 끝나버렸다. 지금처럼 부의 격차가 극심한 반면 대학교육은 보편화된 상황에서 능력주의의 관점으로 대학교육을 바라볼 경우,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대학서열’이 ‘아이비리그를 정점으로 한 서열’로 무늬만 바뀔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먹고살기 힘든 서민들이 끝없는 학력 인플레이션의 계단을 따라 아이비리그까지 쫒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가능하다해도 지속되지 못한다. 능력을 재는 기준 자체가 무한히 학력으로 환원되어버리는 사회에서, 능력주의는 답이 될 수 없다. 답은 사실 우리의 현실 속에 이미 나와 있다. 대학진학률이 80%가 넘는 현실 말이다.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있다면 대학교육을 신분상승의 도구로 바라보던 시각을 과감히 내던지고 공공성과 보편성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학력인플레 또는 학력과잉 담론도 이런 관점에서보면 다소 과장된 측면이 적지 않다. 어떤 이들은 노골적으로 “요즘은 개나 소나 대학에 간다”고 이죽거린다. 그러면서 대학에 가지 않아도 되는, 혹은 가지 말아야할 아이들이 괜히 대학에 가서 부모 등골만 빼먹고 있다고 비난한다. 이런 비난은 정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비겁하기까지 하다. 현실적으로 대학 졸업장이 없이는 취직 뿐 아니라 사회의 평균인 취급도 받기 힘든 상황에서 대학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이미 여러 통계들이 밝혀주고 있듯이 고졸자와 대졸자의 임금격차는 1990년대 이후 급격히 벌어져서 같은 일을 하더라도 임금이 1.5배 이상 차이가 난다. 초등학교 때부터 어린이들에게 대학을 그렇게 강조해놓고 이제 와서 “대학생들이 너무 많다”는 식으로 힐난하는 것은 그야말로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학력인플레 담론은 이를테면 일자리의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 때문에 확산된 담론인데, 세계 어떤 곳도 교육의 목적을 취업이라 명시한 나라는 없다. 교육의 목표는 어떤 사회가 각기 지향하는 공적 가치에 놓이는 게 당연한 것이다. 또한 국가는 최대다수의 주권자에게 최대한 질 높은 교육을 제공하는 걸 교육의 목표로 삼는다. 대학진학률이 높아졌다는 것은 어떤 사회의 고등교육 기회가 확대된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환영해야하는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엄청나게 잘못된 일인 것처럼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은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오히려 비난을 받아야하는 것은 한국의 기업집단들이다. 노동자의 교육비용을 공교육에 전가해 결과적으로 선진국 기업 같으면 자신들이 투자해야 할 비용을 국민전체에 부담시키면서도, 대학교육의 질이 떨어지네 어쩌네 불만만 쏟아놓기 바쁘니 말이다.
오늘날의 대학생들에게 과거와 같은 위상은 부여되지 않는다. 대학생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소수의 우월한 집단이라는 식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유는 단순하다. 대학생들이 과거에 비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과거에 비해 지나치게 많아졌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한 걸까? 그렇다고 하긴 어렵다. 오히려 고등교육의 보편화라는 측면에서는 역사적 진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과거 대학생들에게 사회가 부여한 위상이 과연 적절한 것이었는가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모델이 지속가능한지도 의문이다. 엘리트교육과 대중교육의 비율이나 관계는 해묵은 논쟁거리이긴 하지만, 소위 선진국들이 예외 없이 엘리트교육의 보편화를 경험했으며 사회적 논쟁과 합의를 통해 대응해온 나라들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어쨌든 대학진학률이 80%가 넘는 현재 시점에서 한국사회가 과거의 대학교육 형태로 회귀할 수는 없다. 이미 비가역적인 변화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 변화가 더 나쁜 형태로, 예컨대 극단적 형태의 사유화와 민영화의 형태로 변질되어 그 부담이 다수 대학생과 학부모에게 일방적으로 전가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학의 공공성 테제를 사회적으로 합의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출처: https://xenga.tistory.com/202 [Niemandsnac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