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입시거부선언은 경쟁과 차별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불복종선언]입니다.
입시경쟁교육 그리고 대학을 거부하겠다는 공개적인 선언을 통해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라며 대학을 압박하는 사회가 문제임을 알리며,
대학을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낙오자’라 비하 하는
학력학벌 차별사회에 변화를 요구합니다.
또한 대학을 가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과 지원을 찾기 힘든 대학중심의 사회에서
우리의 존재를 드러내고 권리를 요구하는 [권리선언]이기도 합니다.
대학입시거부선언으로 가방끈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세상, 모두의 다양한 삶이 존중받는 교육과 사회를 함께 만들어요!
A. 투명가방끈 활동 중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입니다. 대학입시라는 룰이 자기에게 불리해서 떼를 쓴다는, 혹은 열등생들의 열폭(열등감 폭발)이거나 자기합리화라는 식의 주장이죠. 대학/입시거부 선언자들이 공부를 못하고, 하기 싫어하는 것은 일부분 사실이기도 합니다. 더 좋은 대학과 더 안정적인 직장만을 위해서, 시험보고 비교하고 경쟁하기 위해서 하는 공부가 하고 싶지 않고, 이런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 대해 문제제기 하는 활동이기도 하니까요.
어떤 사람이 “지금의 사회는 잘못되었다! 바꿔야 한다!”라고 주장할 때, 한국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그 내용보다, 그 발언을 ‘누가 했는지’를 궁금해 합니다. 그리고 사회에서 인정하는 스펙과 성적이 되는 사람인지를 따집니다. 그래서 성실하게 입시를 위해 경쟁하고, 그 안에서 승리한 자만이 대학 입시 시스템의 부조리함에 대해 발언할 수 있다고 말하지요. 반면에 수능성적이나 어느 대학 합격자, 혹은 어느 대학교 학생이라는 지표 자체를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떼쓴다’, ‘열폭한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은 대개 성적이 상위권이거나 상위권 대학을 다니던 사람이 이야기를 하면 또 배가 불러서 그런다고 욕을 하곤 하더군요.)
한편으로는 투명가방끈의 활동에 좀 우호적인 이들의 경우, 실력을 갖추고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운동을 위해서도 설득력 있지 않겠느냐는 조언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투명가방끈’에서는 경쟁을 통해 획득한 좋은 성적, 좋은 스펙이 ‘발언력’이 되는 것 또한 지금의 경쟁 시스템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입시경쟁에 순응한 뒤에 문제제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행동을 통해 현재의 대입시스템과 경쟁교육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있습니다.
A. 대학에 진학할지, 진학하지 않을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한 개인이지만, 이 결정에는 너무나도 많은 사회적 시선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은 학문에 대한 의지와 흥미가 있는 이들을 위한 곳이 아닌, 취업을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 들어서야 할 관문이 되었습니다. 경쟁을 벗어난 곳에는 어떤 사회 안전망도 없는 현실 속에서, 많은 청소년들이 대학입시를 위한 경쟁에 전념하는 것이 모두가 가는 가장 안전한 길이라는 사회의 압박에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입시지옥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사회에서 ‘다른 선택지’는 불안정한 오늘과 내일을 감수해야 함을 뜻합니다. ‘대학 진학이 온전히 개인의 선택이며, 의무와 강제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단체로 대학/입시를 거부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은, 사회의 학력, 학벌차별과 입시경쟁 시스템에 대한 불복종의 의미를 가집니다. 지금의 불합리한 구조에 불복종의 방법으로 문제제기하고, 구조를 바꿀 것을 요구하기 위해 굳이 많은 이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대학/입시를 거부한다는 액션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A. 아등바등 경쟁해서 대학에 가거나 취업전선에 뛰어들지 않아도 될 만큼 풍족한 자원을 가지고 있거나, 대학/입시 거부 이후에도 아무런 부자유 없이 살아갈 만한 ‘살 길’이 있는 이는 지금 ‘투명가방끈’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투명가방끈’의 운동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굳이 불안정한 삶을 ‘선택’하고 이를 ‘선언’하는 것은 경쟁을 내려놓고 오늘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안정적 내일에 대한 대안을 사회에서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투명가방끈은 사회가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안전망을 제공해서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미래에 대한 불안에 쫒기지 않을 수 있도록 할 것을 요구합니다.
A.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거나, 대학에서 뛰쳐나온 이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와, 대학의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는 다른 영역의 것입니다. 저마다 그 역할이 다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학/입시거부자들은 입시를 거부한 사람, 대학으로부터 벗어난 이들의 위치에서 자신의 삶과 자신을 둘러싼 사회의 변화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또, 대학을 둘러싼 문제는 비단 특정한 어떤 대학의 문제나 대학에서만 일어나는 대학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의 학력, 학벌주의, 그리고 경쟁적인 삶은 대학 내부에서 만들어내는 문제도, 대학 안에서만 일어나는 문제도 아닙니다. ‘명문대’를 위한 경쟁적 교육은 대학에 가지 않으면 불안정한 삶을 살게 되는 취약한 사회안전망에서 비롯되었고, 사회는 대학입시 전 뿐만이 아니라 대학 안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계속 경쟁을 요구하며 개인의 삶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투명가방끈의 대학입시거부 운동은 대학입시를 향한 경쟁적이고 반인권적인 교육을 문제제기의 시작으로 삼았지만, 대학문제와 맞닿아 있는 대학 안팎의 여러 사회 구조와 인식을 바꿔나가고자 합니다.
A. 투명가방끈에서는 대학을 모두 없애자거나, 모든 사람이 대학에 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고등학문을 위한 교육기관은 사회에 필요한 것이고, 대학이 이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경쟁과 선별을 통해서 살아남은 강자에게만 학문의 기회가 주어지는 형태인 현재 대학의 모습에는 반대합니다.
모두가 서로 다른 이유로 대학에 갈 것을, 혹은 대학에 가지 않을 것을 결정합니다. 물론, 이 결정은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대학을 선택하지 않은 삶은 곧 불안정한 삶이 되어버리는 지금의 사회에서, 경쟁하지 않으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없는 교육제도 속에서는 대학을 거부한다는 결정은 제대로 존중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대학에 가는 결정이 존중받는 것만큼, 대학에 가지 않는 결정 또한 존중되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대학에 가지 않아도 불안감 없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꾸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A. 대학/입시거부라는 행동은 투명가방끈의 주장을 사회에 알리고 우리의 삶을 바꾸기 위한 하나의 ‘액션’이고 행동 방식입니다.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거부뿐만이 아니라 다른 방법들로도 투명가방끈의 주장에 동의를 표시하고 지지해주고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투명가방끈은 학력주의, 학벌주의, 그리고 삶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경쟁적 사회를 바꿔내고 싶은 분들 모두의 참여가 필요합니다.
A. 경쟁이 필요한 분야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운동 경기 같은 경우, 팀이나 개인간의 경쟁을 중심으로 룰이 짜여 있고, 이가 재미의 한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가끔은 성과의 향상을 위해 경쟁을 일시적으로 도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투명가방끈은 세상의 모든 경쟁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배우는 과정, 일 하고 살아가는 모든 과정이 전부 경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입시경쟁은 쉽게 점수로 나타낼 수 있는 학문만을 강요하거나, 수치로 나타낼 수 없는 여러 가지를 억지로 수치화해서 줄 세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전혀 다른 영역의 학문이지만 지금의 교육과정에서는 성적에 따라 학과와 전공이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국영수’를 비롯한 전체 교과의 등수가 어떤 사람의 흥미나 적성을 말해주지는 않을 텐데 말입니다. 이런 식의 경쟁은 삶의 전반적 부분에서 다른 사람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게 하며 불안만을 낳을 뿐입니다.
재미, 혹은 더 나은 결과를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은 경쟁이, 그 결과로 한 사람의 인생을 쉽게 좌지우지 할 수 있게 한다면 이는 본말전도이지 않을까요?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과도하게, 그리고 무분별하게 이뤄지고 있는 경쟁은 없어져야 합니다.
A. 대학입시거부가 과격하다, 공감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대학에 가지 않는 선택을 한 사람들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 불편하다.”는 말과 비슷합니다. 대학입시거부선언이 사회에 큰 충격을 던진 사건임은 분명하고, 개인적 차원의 대학거부, 수능거부와는 달리 집단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 있어서 더욱 파장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학입시를 거부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은, 그만큼 입시경쟁이나 학력, 학벌주의가 견고하다는 것을 역으로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기존의 구조가 견고한 만큼, 사회의 주목을 이끌어내고 담론을 활성화 시킬 수 있는 강한 액션을 통해 근본적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면, 액션이 ‘과격’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투명가방끈에서는 대학입시거부와 더불어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주장을 풀어내고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투명가방끈의 주장에 동의하고 대학입시거부행동에 동참한 사람들은 분명 ‘공감’을 통해 참여하게 되었으니까요.
A. 김예슬씨의 대학거부 때부터 대학거부가 화제가 될 때마다 그것이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어떠한 정치적 세력이 배후에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는 계속 나왔습니다. 누군가가 어떤 행동을 통해 자기주장을 할 때, ‘배후설’이 등장하는 것은 그 개인을 의사 표현 능력이 없는 미숙한 존재로 보고, 그렇기에 그 행동을 가치 없는 것으로 폄훼하기 위한 주장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 ‘미성숙한 존재’는 순수해야 하고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억압을 받게 됩니다. ‘다른 정치적 목적’없이 ‘순수하게’ 사회의 문제를 바꿔내려 한다? 뭔가 말이 이상합니다. 대학과 입시를 거부하겠다는 우리의 선언은 그 자체로 정치적입니다. 지금의 교육과 사회의 모습에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바꿔나가자고 요구하는 것이니까요. 투명가방끈의 활동은 배후조종이 아닌 자발적 참여에 의해 이뤄지지만, 정치적 의도가 충만한 행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A. 대학입시거부 활동을 지지해 주시는 분들로부터 이런 느낌의 격려를 받기도 합니다. “빌 게이츠가 대학도 안 나왔지만 성공한 CEO가 되었고..” 와 같은 성공담을 기대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공부나 성적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 최고가 된다.’는 성공사례를 이뤄내는 것은 투명가방끈이 원하는 사회의 모습은 아닙니다. 이는 결국 모두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를 만들어냅니다. 경쟁이라는 구조의 특성상 누군가 상위권이 된다면 누군가는 하위권이 됩니다. 사회적 불평등과 부조리가 만들어 낸 불안정한 삶을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전가시키게 되는 거죠. 투명가방끈의 운동은 다른 길의 ‘특출한 성공’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를 바랍니다.